강경읍: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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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들어 조선에서 근대화의 수혜를 입는 첫 번째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일본인들은 강경포로 대거 진출하여 시장에 각종 상점과 금융 건물을 세웠다. [[1910년대]] 초반에 지어진 [[한일은행]] 건물이 대표적이다. 강경은 전성기에 인구가 3만명에 달했고 유동인구는 10만명에 달했다. 1920년대 강경은 [[충청남도]]에서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온 도시였다. 근처에 세워진 소규모 수력발전소에서 전기를 공급하였다. 강경극장도 세워졌다.
 
강경포가 위치해 있는 지역의은진현(恩津縣)의 행정 구역은 여러 차례 변동을 거쳤다. 조선시대에는 강경포와 강경장이 있는 주요지역이 전라도에 속해 있어, 전라도 강경으로 더 유명했다.<ref> [http://www.jjan.kr/news/articleView.html?idxno=486592 <nowiki>[30. 금강 하구역 갈등 해법]</nowiki> 전북·충남 지역논리 접고 상생발전 열린 대화 필요], 한승우(전북녹색연합 사무국장) 기고, 《[[전북일보]]》, 2013년 10월 14일. </ref> 일본인들이 진출해 시가지를 조성한 후인 [[1912년]]에는 [[충청남도]] [[은진군]] 김포면이었고, 2년 후 은진군이 논산군으로 개편되면서 [[1914년]]에는 강경면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강경읍과 경계에 있었던 일부 리가 단계적으로 강경읍으로 편입되어 행정구역이 확장되었다.
 
강경에는 김대건 신부가 처음으로 전도를 시작한 사바위 성당, 한국 최초의 침례교회인 강경 침례교회,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한 강경 성결교회가 소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