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히 신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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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6월 : 오사카 본사가 마지막으로 납활자 신문 제작을 중단함. 컴퓨터 신문 제작 시스템 '넬슨'으로 완전 이행.
* 1988년 6월 : 이른바 '[[리크루트 사건]]' 특종.
* 1991년부터 다음해에 걸쳐서 「종군 위안부」문제의 연재 캠페인을 전개했다. 이 기사는 요시다(吉田) 기요하루(淸治) 저의 『제 전쟁 범죄·조선인 연행 강제 기록』에 있는 「쇼와(昭和)18년(1943년)에 군의 명령으로 한국의 제주도(濟州島)에서 여성을 강제 연행해서 위안부로 했다」라고 하는 체험 담을, 4회 (이 4회를 포함시키고, 요시다(吉田)에 관해서는 계16회)에 걸쳐 보도하고, 아침 해는 「(조선)총독부에 50명,혹은 100명의 경관과 하나가 되어서 마을을 포위하고, 여성을 도로에 내쫓는다. 목검을 휘둘러서 여성을 때리고, 차고, 트럭에 가득 채운다」 「요시다(吉田)씨들이 연행한 여성은, 적어 보아도 950명 쓸었다」 (1992년1월23일 1면 칼럼 「창문논설위원실로부터」)등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 요시다(吉田)의 「체험 담」은 하다(秦) 이쿠히코(郁彦)·타쿠쇼쿠대학(拓殖大學) 교수(당시)의 조사에 의해 거짓말인 것이 밝혀지고, 요시다(吉田) 기요하루(淸治) 본인도 일부가 픽션인 것을 인정했다. 또, 아사히신문도 1997년3월31일에 「확인할 수 없다」라고 하는 사실상의 정정 기사를 냈다.
* 1996년 : 서부 본사의 제작(조판 등) 기능이 후쿠오카 본부로 이전.
* 2002년 3월 : 46년간 이어온 일요일판 폐지, 4월부터 새롭게 토요일판 '''be'''를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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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 회원제 사이트인 아스파라클럽 시작.
* 2006년 1월 : 아사히 신문 창간 127주년 기념 '저널리스트 선언'이라고 하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고 대대적으로 선전.
* 2014년8월5일, 아사히신문은 독자검증의 결과, 요시다(吉田) 증언의 증거가 찾지 않고, 허위라고 인정해 기사를 철회했다. 그러나 독자에게 대한 사죄는 일체 없고,또, 사장의 기무라(木村) 다다카즈(伊量)는 사죄를 하지 않을 방침을 밝혔다. 매스 미디어로서의 설명 책임을 수행하지 않고 있는 태도에 대해서, 일본 국내의 매스컴(mass communication)에서 비판이 일어나고, 지상논쟁이 되풀이되었다. <ref name="">[http://www.microsofttranslator.com/bv.aspx?from=en&to=ko&a=http%3A%2F%2Fwww.asahi.com%2Ftopics%2Fianfumondaiwokangaeru%2Fen% Thinking_about_the_comfort_women_issue]</ref><ref>[http://www.microsofttranslator.com/bv.aspx?from=en&to=ko&a=http%3A%2F%2Fthe-japan-news.com%2Fnews%2Farticle%2F0001499501 SPECIAL_REVIEW_of_The_Asahi_Shimbun’s_“Comfort_Women”_Reporting_/_The_paper_slow_to_correct_its_errors]</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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