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해: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Yjs5497 bot (토론 | 기여)
잔글 →‎남반부: 맞춤법 교정. 사용자:yjs5497_bot의 맞춤법 교정목록을 참조하세요 using AWB
Choboty (토론 | 기여)
잔글 FA/GA 틀 제거. 위키데이터 배지시스템 적용; 예쁘게 바꿈
24번째 줄:
북해는 [[지질학]]적으로 오래된 [[바다]]로 약 3억 5천만년 동안 수많은 변화를 겪어 왔다. 북해의 [[분지]]가 완전히 가라앉은 것은 [[제3기]] 때의 일이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약 11000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날 무렵이었다.
 
빙하기 동안의 북해는 몇 번이나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고, [[간빙기]] 동안에는 많은 북해의 [[해안]]들이 침수되어 있었다. [[비스와 빙하기]](Vistulanian glaciation) 동안에는 다른 빙하기 때와 마찬가지로 수량의 대부분이 최대 3km까지 두꺼운 얼음을 형성하고 있었다. 빙하기가 절정일 때의 [[수심]]은 오늘날보다 최고 120m까지 낮았으며 [[해안선]]은 현재보다 600km 북쪽에 놓여 있었다. 즉, 당시 북해의 바다 면적은 현재보다 훨씬 작았다. 비스와 빙하기가 끝날 당시의 수심은 [[평균해수면]]보다 60m 정도 아래였고, 해안선은 지금의 [[도거뱅크]] 북쪽을 따라 펼쳐져 있었다. 북해의 남단부는 당시까진 대륙이었고 그레이트브리튼 섬은 이 '도거랜드'를 통해 유럽 대륙과 육지로 이어져 있었다.
 
기원전 4500-5000년쯤부터는 영국 해협과 [[모래톱]]이 있는 바다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해진(海進)과 해퇴(海退)가 반복되었고, 기원전 3000년에는 남단부 해안의 수심이 현재의 4m 이하, 기원후가 될 즈음에는 2m 이하에 가까워졌으며 수심은 계속 높아지다가 11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다시 기원전 말의 수준으로 내려갔으나 이후부터는 다시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ref name="Behre">[http://www.eucc-d.de/plugins/coastline_reports/coastline_reports1.php 카를 하인츠 베레(Karl Heinz Behre): „Die Schwankungen des mittleren Tidehochwassers an der deutschen Nordseeküste in den letzten 3.000 Jahren nach archäologischen Daten.“ In: Coastline Reports 1-2004]</ref> 21세기 초까지 7500년 동안은 수심이 매 세기마다 평균 33cm가 올라갔는데, 상승 속도는 점차 느려지고 있으며 20세기 동안에는 20-25cm가 높아졌다.
30번째 줄:
=== 형태와 구성 ===
[[파일:Doggerbank.jpg|thumb|위성 촬영 그림, 도거뱅크의 위치가 빨간 색으로 둘러싸여 있다]]
북해는 평균 수심이 94m인 대륙붕 해역이다. 수심은 평균 25-30m 정도로 깊어도 50m 미만인 남부에서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높아져 노르웨이와 셰틀랜드 제도 사이에서는 100-200m에 이르게 된다. 해안 지역을 제외하면 가장 얕은 곳은 도거뱅크이다. 남부에서는 크고 긴 개펄이 많이 있다.
 
북해는 일반적으로 남부, 중부, 북부와 스카게라크 해협으로 통하는 [[노르웨이 해구]]로 나뉜다. '북해의 남쪽 만'(灣, Southern Bight)은 벨기에에서 시작되어 [[독일 만]]과 [[헬골란트 만]]까지 포함한다. 도거뱅크는 독일 만과 북해 중부를 가른다. 모래톱은 네덜란드의 [[덴 헬더]](Den Helder)에서 덴마크의 [[에스비에르]](Esbjerg)까지 거의 끊임없이 볼 수 있다.
36번째 줄:
네덜란드의 절반 정도 크기를 가진 도거뱅크의 수심은 13-20m 정도이며 좋은 어장으로 유명하다. 폭풍우가 불 때는 파도가 종종 여기서 방향을 틀곤 한다.
 
노르웨이 해구의 평균 수심은 250-300m이며 스카게라크 해협 근처에서는 예외적으로 725m에 달한다. 해구를 따라서는 대서양으로 [[노르웨이 해류]]가 흐르며 이에는 [[발트 해]]에서 유입된 바닷물도 포함된다. 스코틀랜드의 [[던디]](Dundee)에서 약 200km 가량 동쪽으로 떨어진 북해 중부에는 악마의 소굴(Devil's Hole)을 비롯해 수심이 갑자기 올라가는 장소가 여러 개 존재한다. 이런 곳에서는 물이 90m에서 230m로 깊어진다.
 
도버 해협의 깊이는 약 30m이다. 해저는 영국 해협 서부로 갈수록 낮아져 동쪽 끝과 서쪽 끝의 차이는 100m가 난다. 네덜란드와 영국 사이의 수심은 보통 20-30m이며 네덜란드 쪽이 최고 45m로 약간 더 깊다.
50번째 줄:
=== 물의 순환 ===
 
대서양의 물은 영국 해협과 그레이트 브리튼 섬의 해안을 따라 흘러든다. 가장 중요한 [[담수]](淡水) 공급원은 사실 [[발트 해]]이며, 정확히는 [[발트 해]]로 흐르는 강물들이다. 북해와 직접 연결된 강들은 매년 296-354km³([[발트 해]]: 470 km³)의 물을 바다로 내보내며 841.500 km²([[발트 해]]: 1.650.000 km²)의 면적을 거른다. 한편 노르웨이 해류는 대개 50-100m의 깊이를 지닌 곳에서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해안을 따라 대서양으로 흐른다. 온도가 더 높은 대서양의 해류는 여기서 방향을 북쪽으로 바꾸며, 바닷물의 내부 기온이 다른 곳보다 높은 데에 일조한다. 겨울 노르웨이 해류의 기온은 2-5&nbsp;°C(대서양: 6&nbsp;°C), 염도(鹽度)는 34.8‰ 이하(대서양: 35‰이상 )이다. [[발트 해]]의 [[기수 (물)|기수]](汽水)와 [[피오르]](fjord) 등에서 유입되는 물들이 북해의 함염량을 비교적 낮게 조정한다.
 
1-2년 사이에 북해의 물은 완전히 새로워진다. 바닷물의 기온, [[영양소]] 또는 오염의 종류에 따라 알아낼 수 있는 해수 전선은 겨울보다는 여름에 더 뚜렷하다. 큰 해수 전선으로는 대서양에서 오는 물을 영국 해협의 물과 분리하는 '프리지아 전선'과 해안가의 물을 북해 중부와 나누는 '덴마크 전선'이 있다. 북해와 합류하는 강물은 천천히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편이다. 예로서 라인 강과 엘베 강에서 흘러드는 물은 덴마크 북서쪽 해안까지 북해의 다른 물들과 구분하기가 용이하다.
 
북해로 흘러드는 주요 강들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ref name="EST">[http://saup.fisheries.ubc.ca/lme/SummaryInfo.aspx?LME=22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의 어업 센터(Fisheries Centre der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ref>:
76번째 줄:
북해 자체는 [[조석]](潮汐) 현상을 일으키기에 너무 얕고 작기 때문에 북대서양이 이 역할을 대신한다. 밀물과 썰물은 12.5시간 정도의 간격을 두고 교대한다. 조수는 [[코리올리 효과]]에 의해 스코틀랜드 동부 해안에서 남쪽으로 흐르며 영국 해안을 거쳐 12시간 정도 후에는 독일 만에 들어선다. 영국 해협을 통해 흘러오는 조수에 의해 생기는 [[무조점]](無潮點)은 도버 해협 바로 앞에 있으며 영국 남부와 네덜란드의 [[데 호프덴]](De Hoofden) 사이에 낀 지역의 간만에 영향을 준다. 덴마크 남부와 스코틀랜드 남부를 잇는 선상(55°25'N, 5°15'E)과 노르웨이 남부에도 무조점이 있다. 조수는 이들 지역의 주위를 돌아서 흐른다.
 
조수간만의 차는 노르웨이 남부에서는 약 50cm 정도이며 해안이 무조점에서 멀수록 커진다. 얕은 해안과 깔때기 형태로 비좁아지는 부분도 차이를 벌어지게 한다. 조차가 6.8m로 가장 큰 곳은 영국의 워쉬 하구(Wash)이며 독일 해안의 조차는 2-4m 정도이다.
 
== 생활권 ==
 
강한 조석 현상과 바다가 얕은 곳에 다수 서식하는 [[켈프]]와 [[해초]], 종류의 다양함, 풍부한 영양소 등이 북해를 다양한 생명들의 서식지로 만든다.
 
북해에는 여러 종류의 군집(群集)이 존재하는데 기본적으로는 해안 지대와 물로만 구성된 지대로 나눌 수 있다.
 
북해에는 간만의 차이에 따라 환경이 달라지는 염성 [[소택지]](鹽性沼澤池)와 조간 소택지(潮間 沼澤池), 하구가 다수 있다. 북해의 조간 소택지는 세계적으로 제일 크고 서식하는 생물의 종류도 가장 다양하다.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원양(遠洋) 지대와 해저 지대로 구분할 수 있다.
104번째 줄:
=== 북반부 ===
[[파일:Geirangerfjord.JPG|thumb|노르웨이의 게이랑게르 피오르(Geiranger Fjord)]]
그레이트브리튼 섬은 동부 해안만이 북해에 속하며 완전히 북해에 둘러싸인 군도(群島)로는 셰틀랜드 제도와 [[오크니 제도]](Orkney Islands)가 있다.
 
여러 대의 빙하기 동안에 현재의 해안이 있는 곳에 놓여 있던 빙하가 여러 마디로 갈라진 해안 지대를 만들었다. 노르웨이에 많이 분포된 피오르(fjord)는 고산 지대에서 내려온 빙하가 길고 좁은 틈을 파내고, 수심이 상승할 때 그 곳에 물이 차오름으로써 형성되었다. 피오르에서는 가파른 해안선을 자주 발견할 수 있으며 수심은 북해에서는 비교적 깊은 편에 든다.
114번째 줄:
[[파일:1972 Orkney Islands.jpg|thumb|[[펜틀랜드 만]](Pentland Firth)에서 촬영한 오크니 섬(1972년)]]
 
노르웨이 남부와 스카게라크 해협에 면해 있는 [[스웨덴]] 남부의 해안에서는 [[암초]] 해안을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피오르나 피예르와 마찬가지로 빙하가 광범위한 지역을 깎아낸 데서 비롯된 것이다. 노르웨이 남부에서 특히 많이 발견할 수 있는 해안가의 암초들은 수 킬로미터 정도 길고 거의 완전히 닳은 상태로 바다 표면의 조금 밑에 놓여 있다.
[[파일:Keitum Wattenmeer.jpg|thumb|쥘트 섬의 [[카이툼]](Keitum)에 있는 개펄]]
 
=== 남반부 ===
 
벨기에에서 덴마크에 이르는 남부와 남동부의 해안 역시 빙하기에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나, 바다와 퇴적물에 의해 받은 영향이 위에서 언급한 곳들보다 훨씬 더 크다. 해안은 얕고 평평하며 조수의 범람과 후퇴가 반복된다. 바닷물은 [[퇴적]] 작용을 일으킨다. 조수차가 1.35m보다 작은 네덜란드나 덴마크의 해안에는 사구(沙丘)가 있는 경사가 완만한 해안이 형성된 반면 조수차가 1.35m-2.9m 사이인 곳에서는 퇴적물에 의해 섬이 생기며 엘베 강 어귀에서처럼 조수가 2.9m보다 높으면 물밑에 사주가 잠긴다.
[[파일:Helgoland Vogelperspektive.jpg|thumb|공중에서 내려다본 헬골란트 섬]]
네덜란드의 [[서프리지아 제도]]와 독일의 [[동프리지아 제도]]는 파도가 부서지는 곳의 변두리에 자리 잡고 있으며 여기에 침전되는 퇴적물이 쌓인 결과이다. 퇴적물은 계속 높아졌고 식물들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으며 땅은 계속 단단해져 오늘날에는 상당히 고정된 상태이다. 그럼에도 일부는 계속 역동하고 있는데 예로서 동프리지아 제도의 [[유이스트 섬]](Juist)의 교회가 섬의 변동에 의해 [[1650년]]부터 5번 위치를 바꾼 것으로 이를 증명할 수 있다. 원래 유이스트 섬은 두개의 섬이 하나로 합쳐져 탄생했다. 이웃한 [[방어로게 섬]](Wangerooge)은 [[1700년]]-[[2000년]]까지 섬 자체의 길이만큼 동쪽으로 떠내려갔다. 환경적 여건에 의해 이 두 프리지아 제도의 서쪽은 계속 닳는 반면 동쪽에는 새로운 퇴적물이 쌓인다. 따라서 주민들은 섬들의 서부에 있는 시설들의 보호에 신경을 더 쏟는다. 섬들 사이에는 조수의 통과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물길이 존재하며, 이는 섬들이 언젠가는 붙어 자라게 되는 현상을 막는 용도로 쓰인다.
147번째 줄:
== 인간에 의한 활용 ==
 
인구 밀도가 1000/km² 이상으로 매우 높은 지역은 북해 남단의 해안에서 150km까지 떨어진 곳으로, 이곳의 인구는 8000만에 이르며 이 중 절반은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도심]] 지역에 산다. [[브뤼셀]]에서 함부르크에 이르는 지역은 공업화가 크게 진척되어 있으며 세계적으로 [[중공업]]의 밀집도가 가장 높은 곳으로 손꼽힌다.
[[파일:Thames Barrier London.jpg|thumb|강어귀의 보호는 보통 방벽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템스 강의 방벽(Thames Barrier)]]
=== 정치적 상황 ===
 
북해는 정략적 중요성은 이미 [[바이킹]]의 시대부터 높았으나 [[2차 대전]] 직후까지는 법적으로 보아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인접국들은 자신의 해안에 가까운 지역만을 자국령으로 취급해 왔을 뿐이다. 20세기 중반부터 이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북해에 인접한 각국은 12해리 영해 내에서의 어업권을 자국 선박에 한정한다. [[아이슬란드]]가 200해리 영해까지 어업권이 미치는 것을 관철시킨 후로는 EU 연합 역시 이를 선례로 삼았기 때문에 북해는 기타 국가들의 어민들에게는 사실상 폐쇄된 영역이 되었다. 어업 정책은 EU 연합이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와 합의해 결정한다.
 
북해에서 지하 자원이 발견된 이후 노르웨이는 대륙붕으로 연결된 곳의 자원에 대한 권리를 자국 것으로 선언했는데 여기에 다른 국가들도 동참했다. 북해를 분할할 때는 보통 연안 국가들의 해안 사이를 북해 위로 직선을 그어 연결했을 때, 그 중간에 해당하는 부분을 경계로 한다. 이는 해안의 길이에 비해 몫이 적은 독일에 불리했으므로 소송에 의해 덴마크와 법적 분쟁이 발생했고, [[국제 사법 재판소]]는 독일의 영역을 북해의 중앙 부분 쪽으로 조금 더 늘려 주었다.<ref name="ICJ">[http://web.archive.org/web/20061002113239/http://www.icj-cij.org/icjwww/idecisions/isummaries/icssummary690220.htm 국제 사법 재판소: 북해의 대륙붕 건 재판의 요약, 1969년 2월 20일의 판결(Case Summary North Sea Continental Shelf Cases, Judgment of 20 February 1969)]</ref>
326번째 줄:
=== 상선의 통행 ===
[[파일:ECT_waalhaven_bij_nacht.jpg|thumb|로테르담 항]]
유럽의 가장 큰 항구들은 북해 어귀에 있는 경우가 많다. 통행은 군소 항구에서 4개의 규모가 큰 항구에 집중되는 추세인데, [[로테르담]], [[안트베르펜]], 함부르크, [[브레멘]]/[[브레머하펜]]의 화물업은 1991년부터 2000년까지 약 66%가 늘어났다. 이 중에서도 가장 크고 중요한 로테르담의 경우에는 매주 [[연계 화물선]](feeder ship)이 140개의 타도시로 운항한다. 스칸디나비아 반도나 [[발트 해]] 쪽으로는 브레머하펜과 함부르크가 경유지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파일:Hafenschlepper 01 KMJ.jpg|thumb|예인선이 퇸스베르크(Tønsberg)에서 온 타메시스 호(Tamesis)를 돌리고 있다]]
1990년대에는 세계 운항량의 27.5%가 북해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는 더 늘어나는 추세이다. 이들의 대부분은 북해 남부에 치중되어 있으며 이 중에서도 특히 엘베 강 어귀에서 영국 해협 사이에 그 밀도가 높다. 1960년대부터는 원활한 운항을 위해 정해진 물길을 따라 배들이 통행하게끔 되었으며, 수심의 깊이가 항상 일정하게 유지되는 이 해상 수로들은 도버 해협에서부터 독일 만에 걸쳐 있다. 대규모 항구들은 기본적으로 이 해로로 통하는 길을 가지고 있다. 근대 이전에는 [[봄]]과 [[가을]]의 폭풍철에 곳곳에 놓인 여울 등으로 인해 선박들이 좌초하는 사고가 자주 일어났는데, 일부에서는 이런 선박들을 털어서 생계를 꾸려 가기도 했다.
352번째 줄:
7세기 경에는 현재의 [[네덜란드]]에 거주하던 프리지아인들이 북프리지아 제도에 터를 잡았으며 이들은 11세기에 위트인들의 거주지인 [[윌란 반도]] 남쪽으로까지 이주했다.
[[파일:North sea languages 900.png|thumb|900년 경 북해 연안의 언어 분포도를 나타낸 그림. 붉은 색은 노르웨이어, 오렌지 색은 덴마크어 녹색은 독일계 언어를 나타냄]]
현재의 [[덴마크]]와 [[노르웨이]]에 본거지를 두었던 [[바이킹]]인들은 [[793년]] [[린디스파른]](Lindisfarne)을 습격한 것을 시작으로 수백년간 북해를 따라 수로와 해로를 통해 유럽 각지를 약탈했다. [[851년]]부터는 현재의 [[영국]]에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이 흐름은 [[1050년]]쯤까지 계속되었다.
 
[[웨섹스]]의 [[앨프레드 대왕]]은 작센인으로서는 최초로 바이킹에 대항하기 위해 함대를 편성했으며 덴마크인들을 자신의 영내에서 축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앵글인들과 작센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대륙의 동족들에게서 완전히 분리된 데 반해 바이킹인은 [[스칸디나비아]]와의 관계를 지속시켰고, 따라서 그레이트브리튼 섬의 상당수 지역들은 스칸디나비아 지배자들의 해외 영지로서 통치를 받았다.
364번째 줄:
[[1441년]], 그 때까지 무역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한자 도시들은 네덜란드인들을 동격으로 인정하게 되었는데, 이는 한자 도시의 외부 거점인 브뤼게에 대해 플랑드르계의 안트베르펜이 강력한 경쟁자로 출현했고 더구나 네덜란드인들이 덴마크와 동맹을 맺은 데에서 연유했다. 네덜란드인들은 [[1534년]]부터 [[1536년]]까지 벌어진 덴마크의 내전(Grevens Fejde, [[백작들의 다툼]])에 개입해 승리한 이후 [[발트 해]] 연안과 같이 한자 도시들이 주도하던 무역 지대로도 손을 뻗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16세기에 세계적인 무역 강국으로 발전했고 북해는 해외로 뻗어나가기 위한 출발점이 되었다. 이들은 [[스발바르 제도]] 가까이에선 [[고래]]를 사냥하고, [[인도]]와는 [[향료]] 무역으로 수익을 올렸으며 [[브라질]], 북아메리카, [[카리브 해]]의 섬들과 [[남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무역으로 얻은 부는 17세기의 네덜란드에 황금기를 가져다 주었다.
[[파일:Nooms - De Paerrel en Den Dubbelen Arent.png|thumb|인도로 항해하는 네덜란드 배들(1650년 경)]]
[[1651년]] 영국에서 제정된 항해법(Navigation Acts)은 네덜란드의 무역에 지장을 주었기 때문에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발발했다. 여기서 패배한 네덜란드는 [[1654년]]의 [[웨스트민스터 조약 (1654년)|웨스트민스터 조약]]에 의해 영국 항해법을 승인해야만 했다.
370번째 줄:
다음해에 영국이 네덜란드에 먼저 선전포고해 일어난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는 프랑스군의 도움을 받은 네덜란드가 우세를 점했고, [[미히얼 데 로이터]](Michiel de Ruyter) 제독이 지휘하는 네덜란드 함대가 영국 함대를 템스 강에서 완파한 후 [[1667년]] [[브레다 평화 조약 (1667)|브레다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의하면 영국은 [[뉴욕|신(新) 암스테르담]](Nieuw Amsterdam) 주변부를 반환하지 않는 대신 [[수리남]]을 네덜란드에 양도해야 했고, 항해법도 네덜란드의 뜻에 맞도록 수정되어야 했다.
 
[[1672년]]은 네덜란드에서는 [[재앙의 해 (네덜란드)|재앙의 해]](rampjaar)라고 부른다. 이 해에는 영국과 프랑스, [[뮌스터 주교구]], [[쾰른 선제후국]] 등이 연합해 네덜란드를 침공해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이 벌어졌고, 네덜란드 해군이 영국군을 상대로 선전하는 동안 프랑스와 뮌스터, 쾰른의 연합군은 네덜란드를 육지에서 유린했다. 영국과는 비겼으나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에는 패배했기 때문에 네덜란드의 세력은 쇠퇴하게 되었다.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상대로 거둔 승리 이후부터 해양 세력으로 성장을 거듭한 영국은 북해의 제해권을 두고 네덜란드와 수 차례에 걸쳐 충돌하다가 17세기 말부터는 해상에서 네덜란드를 능가하게 되었고 이후 전 세계에 걸친 [[대영제국]]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독일 제국]]의 건국 이전까진 혁명 후의 프랑스를 제외하고는 북해에서의 영국의 주도적 지위를 넘볼 수 있는 세력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며 프랑스의 위협 역시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승리한 이후로는 사라졌다.
 
=== 제1차 세계 대전 ===
 
당시의 해군 최강국이던 영국의 해군력은 그 다음가는 해군력을 갖춘 독일보다 훨씬 우세했다. 전쟁 초반, 영국 함대에게는 영국 해협과 북해의 안전을 확보하고 독일을 해상 봉쇄하는 임무가 부여된 반면 독일 해군은 강한 해안 방어 시설을 갖춘 헬골란트 섬에 의지해 독일 만을 지키는 데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1914년]] [[8월 28일]] 헬골란트 섬 앞에서 첫 번째 해전이 벌어졌으며 이는 영국 해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해상 전투에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독일은 [[잠수함]] 위주의 공격으로 전환했고 몇 차례의 실패 이후 1914년 [[9월 22일]], 3척의 영국 [[장갑순양함]]을 네덜란드의 [[훅 판 홀란트]](Hoek van Holland)에서 50km 가량 북쪽에 있는 지점에서 격침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파일:Bluecher sinkend.jpg|thumb|독일의 순양함 블뤼허가 1915년의 도거뱅크 해전에서 침몰하는 모습]]
1914년 11월, 영국 해군성은 북해 전체를 전쟁 지역으로 선언하고 여러 곳에 [[수뢰]]를 깔았다. 또한 북해 위를 운항하는 [[중립국]] 선박들은 영국군에 의해 사전 경고 없이 공격받을 수 있게 되었다.
419번째 줄:
[[분류:북해| ]]
[[분류:대서양의 해역]]
 
{{Link FA|lv}}
{{Link GA|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