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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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레비 왕조의 붕괴와 이슬람 혁명 ==
{{본문|이란 혁명}}
과시성 사업과 군비 강화에 예산을 낭비한 결과, 이란 경제는 [[1976년]] 후반부터 눈에 띄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왕정의 무능과 부패 속에 빈부 격차는 오히려 커졌다. [[1977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지미 카터]]는 그간 묵인해왔던 왕정의 인권 탄압에 우려를 표하고 개선을 요구한다. 그러던 차에 [[1978년]] 왕정은 호메이니를 음해하는 기사를 친 정부지에 게재, 국민을 자극하고 쿰 시에서 열린 신학생 데모를 유혈 진압한다. [[이스파한]]의 바자르가 항의 표시로 철시하고 시위에 나서자 다시 무자비하게 해산하는 등 78년 벽두부터 시위와 유혈 진압의 악순환이 시작됐다. 8월 아바단에서 시위 군중이 경찰을 피해 들어간 [[렉스 시네마]]에 불이 나서 400여명이 숨지는데, 훗날 조사에서는 광신도의 방화로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누구나 비밀 경찰의 소행으로 믿었다. 9월 성난 군중이 [[테헤란]] [[잘레흐 광장]]에 운집하자 경찰이 무차별 발포, 유혈극이 벌어졌다.
 
[[이라크]]는 이란의 압력에 따라 [[호메이니]]를 추방했으며 호메이니는 [[프랑스]] [[파리 시|파리]]로 [[망명]]해간다. 그의 프랑스 망명은 오히려 이란 반 정부운동이 국제적 주목을 받게 하는 계기가 됐다. 12월 [[팔레비 국왕]]은 온건파인 국민전선 지도자 [[바크티아르]](Bakhtiar)와 협상, 바크티아르에게 총리직을 맡기고 출국하기로 결정한다. 이듬해 1월 팔레비는 이란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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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이란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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