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기 (야구인):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3번째 줄:
|영문 표기 = Kim Dong-Ki
|소속 구단 =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 35
|선수 사진 파일명 =
|사진 사이즈 =
33번째 줄:
 
== 아마 시절==
* [[1981년]] [[인천고등학교]] 3학년 때 제1회 [[세계청소년 야구대회]]에 국가대표로 뽑혀 우승하여 주역을 얻었다.
* [[1982년]] [[인하대학교]] 재학시절 [[인하대학교]] 1학년 때 번트대는 모습이었다. [[국가대표시절]] 대륙간배 대표로 뽑혔다.
* [[1986년]] : [[인하대]]를 졸업하고 [[청보 핀토스]]에 입단하였다.
 
줄 39 ⟶ 41:
* [[1986년]] [[청보 핀토스]]에 입단하였다.
* 주 [[포지션]]은 [[포수]]였고 이후 [[태평양 돌핀스]]와 [[현대 유니콘스]]를 거쳤다.
* 전년도 너무 힘을 썼던 탓일까 95시즌 팀의 성적도 하락했고 김동기또한 부상과 부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br/>66경기에 출전해 1할대 타율을 기록하며 부진을 면치 못했고 다음해 새롭게 바뀐 현대에선 48게임밖에 출전하지 못한 채 은퇴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그의 마지막 위업은 96년 5월31일 [[인천]] [[삼성라이온즈]]전에서 1천게임 출장 달성.<br/> 이는 프로 19번째이며 힘든 포수자리로는 이만수 이후 두 번째이다.
전년도 성적이 저조하면 다음시즌에는 새로운 각오를 다지기 마련. 94시즌을 맞는 [[김동기]]의 각오도 남달랐다. <br/>그 좋아하던 술을 자제하고 열심히 야구에만 매달려 후배 [[김경기]]와 함께 공포의 'KK포'라 불리며 팀을 이끌었다. 결국 팀은 시즌내내 태평양 돌풍을 일으키며 시즌 2위를 차지했고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br/>시즌내내 팀의 안방을 지키며 0.264의 타율에 15홈런, 50타점을 올리며 최고의 포수로 이름을 날렸고 [[올스타전]]에도 팬투표로 뽑혀 출전했다. 하지만 [[골든 글러브]] 시상식에선 우승팀 LG의 [[김동수]]에게 2표차로 정말 아쉽게 밀리고 말았다. 우승과 준우승의 차이었다. <br/>이렇게 김동기는 최고의 기량을 자랑했지만 상복이 지지리도 없는 선수로도 유명하다. 앞선 88년도에도 후반기에 어느정도 타석에 들어가 서있기만 했어도 타격왕 타이틀은 따논 당상임.
 
== 장점 ==
[[대한민국]] 최고의 [[투수]]로 꼽히는 [[선동열]]을 상대로 2번의 만루 홈런을 뽑아낼 정도로 강한 면모를 보였다.
 
 
은퇴 이후 [[보험]]업, [[중학교]] 야구팀 감독, [[건설업]] 등을 했었고, 사회인 야구 선수 지도를 거쳐 현재는 자신의 모교인 [[인천신흥초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활동 중이다.<ref>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812310231 [피플 인 메모리]"선동열 울리던 '꽃돼지' 다시 뜁니다"] 《동아일보》, 2008년 12월 31일 </ref> 전 삼미 슈퍼스타즈 및 청보 핀토스 투수 [[김상기]]와 형제지간이다.
 
 
== 은퇴 히후 ==
은퇴 이후 [[보험]]업, [[중학교]] 야구팀 감독, [[건설업]] 등을 했었고, 사회인 야구 선수 지도를 거쳐 현재는 자신의 모교인 [[인천신흥초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활동 중이다.<ref>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812310231 [피플 인 메모리]"선동열 울리던 '꽃돼지' 다시 뜁니다"] 《동아일보》, 2008년 12월 31일 </ref> 전 삼미 슈퍼스타즈 및 청보 핀토스 투수 [[김상기]]와 형제지간이다.
 
== 출신학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