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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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이 세상은 우리가 거쳐 가는 여관일 뿐입니다. 우리의 진짜 고향은 [[천국]]입니다. 저를 따라 [[순교자]]가 되십시오. 저는 우리가 끝없는 영광의 왕국에서 다시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1839년]] [[5월 24일]] [[금요일]], 남명혁은 [[서소문]] 밖으로 이송되어 여덟 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되었다. 그는 머리가 잘려 나갈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가 영광스럽게 순교했을 때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 시복 · 시성 ==
남명혁 다미아노는 [[1925년]] [[7월 5일]]에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 [[시복|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ref name=blessed>{{뉴스 인용
| 제목 = 교황, 화해와 평화..8월의 크리스마스되길
| url = http://www.pbc.co.kr/CMS/news/view_body.php?cid=520930&path=201407
| 출판사 = 평화방송
| 저자 = 이상도
| 날짜 = 2014-07-24
| 확인날짜 = 2014-10-12
}}</ref>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 이뤄진 103위 [[시성|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 참고 문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