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하드리아노 2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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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하드리아노 2세'''(<small>[[라틴어]]:</small> Hadrianus PP. II, <small>[[이탈리아어]]:</small> Papa Adriano II)는 제106대 [[교황]](재위: [[867년]] [[12월 14일]] - [[872년]] [[12월 14일]])이다. 로마의 귀족 집안 출신으로서 고령의 나이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가문에서는 이미 두 명의 교황([[교황 스테파노 4세]], [[교황 세르지오 2세]])이 나왔다.
 
==약력==
하드리아노 2세는 전임 교황의 강경책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의 중재로 교황으로 선출되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루트비히 2세 (신성 로마 제국)|루트비히 2세]]의 승인을 받아 [[867년]] 12월 14일에 즉위하였다. 그는 전임 교황의 정책을 이어받으려고 했으나, 성격이 유화적이고 이미 나이가 많아 여러 가지 일로 곤란을 겪었다. 869년 국왕 [[로타르 2세]]가 사망한 후에 상속 재산을 놓고, [[루트비히 1세 (프랑크)|루트비히 1세]]의 아들들이 그 영토를 나누어 갖기 위해 내분이 벌어지자 하드리아노 2세가 중재에 나섰다. 그리하여 870년 프랑크 군주들 사이에 [[메르센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 조약으로 로타링기아 지역은 동서로 분할되어 각각 [[동프랑크 왕국|동프랑크]]와 [[서프랑크 왕국|서프랑크]]에 편입되게 된다.{{sfn|Chisholm|1911}}
하드리아노 2세는 [[로마]]의 명문 높은 가문 출신이다. 이 가문에서 이미 2명의 교황이 나왔다([[교황 스테파노 4세]], [[교황 세르지오 2세]]). 전임 교황의 강경책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의 중재로 교황으로 선출되어 [[프랑크 왕국]]의 [[신성로마제국의 루트비히 2세|루트비히 2세]]의 승인을 받아 [[867년]] 12월 14일에 즉위하였다.
 
그는 전임자의 정책을 지속시키려고 하였으나 성격이 유화적이고 이미 나이가 많아 강경책을 쓸 수가 없어 여러 가지 일들로 곤란을 겪었다. 로마 교회의 도서관장이자 문서 관리인이며 비서였던 아나스타시우스에 의해 [[교회]]의 일이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는 로마의 힘 있는 가문 출신이었으나 교황과는 관련이 없었다. 그는 사제가 되기 전에 결혼을 하여 딸을 하나 낳았는데 그가 그 딸과 어머니를 죽이자 하드리아노 2세는 그에게 가장 엄한 벌을 내렸으나 얼마 후 그는 복직되어 다시 권세를 누리게 되어 논란이 많았다.
 
프랑크 왕국과의 문제는 [[로타링기아]]의 [[왕]] [[로타르 2세]]가 정실부인 토이트베르가와 헤어지고 애첩 발트라다와 행한 결혼에서 기인되었다. 하드리아노 2세의 노력은 아무 결과를 내지 못하였다. 문제는 로타르 2세가 죽음으로써 깊어졌는데 [[로타링기아 왕국]]에 내분이 일어나자 하드리아노 2세는 [[랭스]]의 힝크마르의 조언을 받던 [[카를 2세 (서프랑크)|샤를 ''대머리왕'']]을 물리치고 루트비히 2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소위 [[독일]]의 [[프린스|왕자]]들, 샤를과 [[프랑크의 루트비히 2세|독일왕 루트비히]]가 [[870년]] [[메르센 조약]]을 맺을 때 [[신성로마제국의 루트비히 2세|황제 루트비히 2세]]는 제외되었다.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드리아노 2세는 부분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869년]] 6월 로마에서 개최된 지방 [[공의회]]는 [[포티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단죄하고, 교황은 사절 3명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하여 로마 교회의 뜻을 전했으나 [[발칸 반도]]에서의 로마 교회의 [[사목권]] 주장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강요에 의해 퇴위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이그나티오스는 [[불가리아의 보리스 1세]]의 초청을 받아들여 그 나라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