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하드리아노 2세: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
편집 요약 없음 |
||
21번째 줄:
842년 [[교황 그레고리오 4세]]는 하드리아노를 [[차부제]]로 서품한 후 [[산 마르코 성당 (로마)|산 마르코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하였다. [[라테라노 궁전]]에서 [[교황 세르지오 2세]]를 도우면서 뛰어난 행정 능력과 자선 활동으로 명망이 높아진 그는 855년과 858년에 각각 [[교황 레오 4세]]와 [[교황 베네딕토 3세]]가 선종한 후에 소집된 콘클라베에서 강력한 교황 후보로 입에 오르내렸으나, 모두 겸손하게 교황직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교황 니콜라오 1세]]가 선종한 후 소집된 콘클라베에서 세 번째로 교황직 수락을 요청받았을 때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전임 교황의 강경책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오스 1세|포티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회의에서 교황 니콜라오 1세를 단죄한다고 선언한 후, 새 황제 [[바실리우스 1세]]에 의해 전임 총대주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이그나티오스|이그나티오스]]가 복직되면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후 포티오스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곧 제8차 세계 공의회인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하드리아노 2세는 자신의 대리인 자격으로 공의회에 교황 특사 세 명을 파견하였다. 공의회에서 교황 특사들은 포티오스를 이단자로 비난하며 그에 대한 유죄 재판을 주재하였으나, 불가리아 교회에 대한 로마 교회의 사목권 주장에 대해서는 다른 교부들과 이해를 같이 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다.{{sfn|Chisholm|1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