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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
=== 출생 ===
아버지 [[조종현]]은 [[전라남도]] [[순천군]](현 [[전라남도]] [[순천시 (전라남도)|순천시]])의 승려이자 시조 시인으로서 [[한용운]]이 총재가 되어 조직된 승려들의 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재무위원을 맡기도 했으며, 당시 승려들의 결혼을 정책적으로 장려했던 일제의 불교 정책에 따라 결혼을 하게 되어, 조정래 자신도 사찰인 선암사에서 태어났다. 4남 4녀의 넷째로 본관은 [[함안 조씨|함안]](咸安)이지만 조정래 본인은 이러한 사실을 별로 달가워하지도 내세우지도 않는다. 해방 뒤 조종현은 토지 분배의 문제를 놓고 주지와 대립하다 [[여순사건]] 때 주지의 모함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할 뻔 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태백산맥에는 법일스님이 지주의 착취로 가난한 [[소작인]]들의 편을 들다가 [[좌익]]으로 몰려 고초당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남국민학교에 입학한 해인 [[1949년]] 순천을 떠나 논산으로 이사하였는데, 바로 이듬해에 [[6.25 전쟁]]이 일어났고<ref>해방 정국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벌어진 무차별적인 학살과 3년에 걸친 전쟁으로 어린 시절 악몽에 시달렸으며, 그 악몽 때문에 야뇨증에[[야뇨증]]에 걸려 늘 오줌을 쌌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태백산맥에는 불교신앙을 버림은 아니지만, 속세로 돌아온 법일스님의 아들이 야뇨증으로 고생해서 누님이 걱정하는 이야기가 나온다.</ref> [[1.4 후퇴]] 때의 피난지에서 처음 지주 소작제의 모순을 알게 되었다. [[1953년]] 벌교상업고등학교의 국어교사가 된 아버지를 따라 당시 삼촌들이 살고 있던 벌교로 이사하였다.
 
=== 문인으로서 ===
광주 서중학교를 거쳐, [[1959년]] 서울로 상경하여 아버지가 전근한 서울 보성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년 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는데, 농촌 사회활동에 뜻이 있어 이과반에 적을 두고 있던 조정래는 3학년에 이르러 국문과로 진학 목표를 세우고 [[1962년]] 동국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하였으며, 대학에서 전공과목과 함께 2급 정교사 자격증을 따서 [[1966년]]에 졸업하고 군입대, [[1967년]] 같은 과 [[김초혜]]와 결혼하였다.
 
[[동구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서 근무하던 [[1970년]]에 《현대문학》 6월호에 '누명'이 첫회추천되어 등단하였으며, 12월호에 '선생님 기행'이 추천 완료되었다. [[1971년]]에 《현대문학》에 중편 '20년을 비가 내리는 땅', 《신동아》에 단편 '빙판'을 발표하였으며, [[연좌제]]를 비판한 내용의 단편 '어떤 전설'(《현대문학》 1971년), [[베트남전쟁]]을 비판한 중편 '청산댁'(《현대문학》 1972년) 등의 작품을 내놓았다. [[1972년]]에 [[중경고등학교]]로 전근하였으나, 정부를 비판한 작품으로 [[보수주의]]자인 학교 교장과의 마찰을 빚게 되고 [[1972년]] [[박정희]]대통령의 [[독재]]를 위한 악법인 유신헌법이 만들어져 [[민주주의]]가 억압받은 [[10월 유신]] 이후 교직을 그만두었다.
 
[[1973년]] [[월간문학]] 편집장이 되었고(~[[1975년]]), [[1974년]] 중편 《황토》를 발표하였다. [[1976년]] '허깨비춤', '방황하는 얼굴', '검은 뿌리', '비틀거리는 혼' 등의 단편과, 장편 '대장경'을 민족문학대계의 일환으로 완성한다. 그리고 포켓용 문예 월간지 《소설문예》를 인수, 10월호부터 발간하게 되는데(~1977.10) 이때 연재를 맡은 집필진 가운데는 친일연구로 유명한 [[임종국]]도 있었다. [[1977년]]에는 [[민예사]] 대표를 맡았으며, '어떤 솔거의 죽음'을 발표하였다. 그때까지의 소설은 "직접 체험을 소설로 써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가지고 쓴 것이었지만, [[1980년]] 광주민중들이 전두환 군사독재에 맞선 민중운동인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직후의 광주를 방문하여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현장을 방문하면서, 그때까지의 원칙을 바꾸게 되었고 이것은 후에 《태백산맥》의 집필로 이어지게 되었다.
 
[[1983년]] 6월부터 《현대문학》에 《태백산맥》의 연재를 시작하였다. [[1985년]]에는 [[한국문학]]의 주간을 맡았으며, 《태백산맥》의 연재 집필을 위해 안양의 성 나자로 마을에 매달 10일씩 칩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