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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신'''(鄭忠信, [[1576년]] ~ [[1636년]] [[5월 4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晚雲), 본관은 [[금성하동 정씨|금성하동]](錦城)이며,<ref> [http://people.aks.ac.kr/front/srchservice/viewSearchPPL.jsp?pItemId=PPL&type=L&pType=P&pSearchSetId=116316&pTotalSearchCount=1&pPosition=0&pRecordId=00500050004C005F0036004A004F0062005F00410031003500370036005F0031005F0030003000310032003400300036&pName=C815CDA9C2E00028912D5FE04FE10029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ref> [[전라도]] [[나주]]의 [[노비]] 출신이다. [[임진왜란]] 때 [[권율]] 휘하에서 종군했고 만포첨사로 국경을 수비했다. [[이괄의 난]] 때 황주, 서울 안현에서 싸워 이겼고 [[정묘호란]] 때 부원수가 되고 조정에서 [[후금]]과 단교하려는 데 반대하여 유배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 봉호는 금남(錦南)이며, 고려의 명장 정지(鄭地)의 후손이다.
 
== 생애 ==
1576년 전라도 광주에서나주에서 부친 정륜과 모친 [[영천 이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전라도]] 나주의 [[노비]] 출신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7세에 [[권율]]의 휘하에 들어가 종군하였다. 나이는 어렸지만 민첩하고 영리하여 권율의 신임을 받았으며 적지를 정찰하고 연락책으로 활동하였다. 권율의 장계를 가지고 의주에 갔다가 [[이항복]]의 주선으로 학문을 배우게 되면서 무관의 길을 걷게되었다. 이항복이 그에게 충신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고 [[조선 선조]] 임금은 정충신을 [[노비]]에서 면천을 시켜주었다.<ref>[http://people.aks.ac.kr/front/board/person/viewPersonStatus.aks?bbsCode=55&isEQ 노비에서 최고 무신이 된 정충신]</ref> 정충신은 이항복의 집에 머물면서 학업을 익혔고 그해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02년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점차 세력을 확장하는 [[여진족]]의 정세를 파악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608년 조산보만호에 임명되어 무관으로 활동했고 1618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였고 스승인 이항복이 북청으로 유배를 떠나자 동행했다. 1619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도원수 [[강홍립]]이 출병하였으나 후금에 대패하는 일이 일어나자 여진족의 정황에 밝았던 그가 다시 등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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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과거 급제자]]
[[분류:진무공신]]
[[분류:금성하동 정씨]]
[[분류:정묘호란 관련자]]
[[분류:이괄의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