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칼라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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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및 활동 ==
=== 출생 ===
[[1923년]] [[12월 2일]] [[미국]] [[뉴욕 시]]에서 아테네 대학 약대를 졸업한 약사 요르고스 칼로예로풀로스와칼로예로풀로스(Γιώργος Καλογερόπουλος)와 배우 지망생이었던 에방겔리아 디미트리아두(Ευαγγελία Δημητριάδου) 부부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칼로예로풀루였으나 발음이 쉽게 하기 위해 [[영어]]식인 칼라스로 줄였다. 그의 부모는 양가 집안의 반대를 피할 겸 생계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온 [[그리스그리스인]] 이민자였다. 아버지 요르고스 칼로예로풀로스는 노동자를 전전하다가 마리아가 태어날 무렵 [[약사]] 면허를 취득하고 [[뉴욕 시]]내에 약국을 개업하였다.
 
아버지 요르고스는 아들을 기대하였으나 딸이 태어나 실망했다 하며, 어릴 때부터 뚱뚱한 체구와 고도의 근시로 날씬한 친언니와 비교되며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어머니 에방겔리아는 그가 태어나자 [[산부인과]] 의사에게 "저리 치우지 못해요!"라고 답했다 한다. 그가 태어난지 2~4개월이 경과한 후에 그의 출생을 인정했다 한다. 어머니 에방겔리아는 불만이 많았는데 성악가, 배우가 되려는 꿈을 포기한 데 대한 불만, 집안의 반대 등으로 결혼생활이 순조롭지 않았던 탓에 잘 웃지 않았고, 어려서부터 그는 어머니 에방겔리아를 만족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래연습을 하였다. 어머니 에방겔리아가 유일하게 미소지을 때는 그가 노래를 부를 때였다.
 
=== 유년기와 소녀기 ===
[[1937년]] 부모의 이혼 이후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나 어머니 에방겔리아는 마리아 칼라스에게 생활비와 용돈을 계속 요구하였고, 칼라스는 아테네 음악원 재학 중 어머니와도 교류를 끊고, 데뷔 전까지 아르바이트 및 친언니가 주는 생활비로 생활하였다. [[1947년]] 메네기기와조반니바티스타 메네기니와 결혼한 이후에는 친정 쪽 가족과는 연락을 끊었다.
 
어려서는 뚱뚱한 체구로 한때 그리스에 체류 중 [[폭식증]]에 걸리기도 했다 한다. 그러나 [[오페라]]극의 [[소프라노]]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 하여 그는 청소년기 무렵 30kg의 체중을 감량하였다. 또한 근시가 심해 두꺼운 안경을 착용하기도 했다. [[1929년]] [[7월]] 마리아 칼라스는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했으며, 아버지 요르고스는 주식에 투자했다가 [[뉴욕]]증권시장의 폭락으로 자신이 운영하던 약국을 팔아야 했다. [[1930년]]경부터 음악공부를 시작하였다. [[1933년]] [[5월]] 초 그가 라 팔라오모나(La Palaomona, 비둘기)를 직접 피아노를 치면서 부르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여 노래가 끝날 때까지 서 있었다 한다. 어머니 에반겔리아는에방겔리아는 남동생 에프티미오에게에프시미오스(Ευθύμιος)에게 둘째딸 마리아의 그리스 국립 아테네 음악원 입학을 주선하게 하였고, 자신이 못이룬 배우, 성악가의 꿈을 딸을 통해 이루려 하였다.
 
[[1934년]] [[미국]] 뮤투얼 라디오 방송국의 아마추어 노래 경연대회에 출전, 라 팔로마를 불러 예선을 통과하고 본선에 출전하였으며 최우수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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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7년만에 아버지 요르요스의 편지를 접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3일]] [[아테네]]에서 솔로 리사이틀 겸 작별 콘서트를 하고 미국으로 갈 여비를 모았다. [[1945년]] [[9월]] [[미국]] [[뉴욕]]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였으며 단역을 전전했다. 그 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에 응모하였으나 주목받지 못하였고, 95kg의 거구가 지적받자 다시 다이어트를 시작하여 감량에 성공한다. 칼라스의 회고에 의하면 영화 [[로마의 휴일]]의 주연 [[오드리 햅번]]의 미모에 반한 것이 다이어트의 계기가 되었다 한다.
 
[[1946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의 단장 에드워드 존슨이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를 듣고 매료되어 메트로폴리탄의 1946년에서 1947년 시즌에서 베토벤의 피델리오와 푸치니의 나비부인의 주연 나비부인역을 제의했으나 마리아는 거절했다 피델리오를 영어로 부르는 것이 싫었고, 81Kg의 체중으로 15세의 가냘픈 여자 역할을 하는게 싫어서였다 한다. [[1946년]] 시카고 오페라단의 단장 바가로치는 말 이탈리아의 [[오타비오 스코토]]의 도움을 받아 시카고 오페라단을 되살리려는 프로젝트를 시작해서 세르지오세르조 파일로니(Sergio Failoni)의 지휘와 칼라스의 주연으로 투란도트를 연주하려고 기획했으나 [[1947년]] [[1월]] 공연을 몇 일 남기고 후원사인 시카고 컴퍼니의 파산으로 공연은 무산되었다.
 
[[1947년]] 초 시카고 컴퍼니사의 직원이었던 이탈리아 베이스 가수 니콜라오니콜라 로시 레미니(Nicola Rossi Lemeni)에게서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의 예술 감독인 지오반니조반니 자나텔로차나텔로(Giovanni Zanatello)를 소개받았다. 자나텔로는 칼라스의 노래에 매료되어 《[[라 조콘다]] (La Gioconda)》의 주연으로 캐스팅했다. [[1947년]] 칼라스는 오페라의 꿈을 포기하라는 주변의 권고를 물리치고 다시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6월 27일]] [[나폴리]]에 도착, 《[[라 조콘다]] (La Gioconda)》를 연습하였다.
 
[[1947년]] [[7월]]에 베로나 음악제에서 폰키엘리의 《[[라 조콘다]] (La Gioconda)》의 타이틀 롤을 불렀고, [[8월 3일]] [[베로나]]의 아레나에서 《[[라 조콘다]]》를 불러 [[이탈리아]]에서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한때 이탈리아인들이 일부 소프라노 등에게 붙이는 "라 디비나 (오페라의 성자)"라는 별칭을 받기도 했다. 공연은 성공적이었으나 별 인상을 남기지 못해 주목받지 못하다가, [[1947년]] [[12월]] 베니스에서 [[이탈리아어]]로 상영되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졸데역에 캐스팅되고, 바로 [[자코모 푸치니]]의 [[투란도트]]의 타이틀롤로 주목을 받아 재계약을 맺게 되었다. 베로나 아레나 공연에서 그의 재능을 알아본 [[지오반니 바티스타 매네기기]]는 그의 후원자가 되었다. 이후 주로 투란도트를 공연하였다.
 
==== 연애와 결혼 ====
한때 연극, 영화감독이었던 [[루치노 비스콘티]]와 사랑에 빠졌으나 곧 결별하였다. [[1946년]] [[지오반니조반니바티스타 바티스타 매네기기]]메네기니(Giovanni Battista Meneghini)를 만나고, 매네기기는메네기니는 곧 그의 팬이자 열렬한 후원자, 매니저가 되었다. [[1947년]] 28년 연상의 매네기기와메네기니와 동거하다가 곧 결혼하였다. 지오반니 매네기기는메네기기는 그의 음반과 각종 활동비용을 후원하였고 칼라스는 노래와 오페라, 가극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1957년]] 선박왕 오나시스를 만나면서 먼저 이혼을 요구하여 이혼하였다.
 
결혼식 직후 친정어머니 에반겔리아는에방겔리아는 내 딸 칼라스라는 책을 내 그를 인신공격하였다. 또한 방송에 출연한 에반겔리아는에방겔리아는 "마리아같은 여자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영원히 행복하지 못할 것"이라며 비난을 쏟아냈다. 이후 칼라스는 친정 가족들과의 [[의절]]을 선언하고 연락을 끊어버렸다. [[그리스]]에서의 데뷔를 포기한 칼라스는 미국, 이탈리아에서 데뷔를 시도한다. 이후 그는 마리아 메네기기메네기니 칼라스(Maria Meneghini Callas)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이혼 후 다시 마리아 칼라스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 이탈리아에서의 활동 ====
1947년 [[밀라노]]의 라 스칼라 오페라단에 입단하고, 《[[청교도]] (I puritani)》의 단역으로 캐스팅되었으나 주인공 엘비라 역으로 낙점된 [[마르가리타마르게리타 카르시오카로시오]](Margherita Carosio)가 [[독감]]에 걸려, 예정에 없이 그가 캐스팅되었다. 대역으로 투입된 칼라스는 3일의 연습으로 무대에 섰는데 호평을 받았다. 이어 [[레나테 테발디]]가 갑자기 아프게 되어 [[아이다]]의 주연 아이다 역을 맡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때 스칼라 오페라단은 칼라스에게 아이다 역의 대역으로 투입했고, [[아이다]] 공연으로 크게 호평을 받으면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청교도》의 엘비라 역, 《아이다》의 아이다 역, 《토스카 Tosca》의 토스카 역 등을 소화해낸 뒤 《노르마》,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디 람메르무어(Lucia di Lammermoor)》 등의 주인공역으로 호평을 받았다. 특히 토스카 공연 중에는 열연하던 중 가발에 불이 붙었으나 끝까지 아리아를 부르기도 했다.
 
[[1948년]] 베니스, 로마, 제노바 등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투란도트, 레오노라를 공연하고 1948년 연말에는 아이다와 노르마 등을 주로 하였다. 1948년 11월 30일 플로렌스의 테아트로 코뮤날레에서 공연한 노르마는 흥행하였다. [[1949년]] 초, 브룬힐데의 브룬힐데 역을 11일간 하였다. [[1949년]]에는 [[베니스]]에서 활동하였으며 [[4월 21일]] [[베로나]]에서 지오반니 매네기기와 정식 결혼식을 올린 뒤 [[아르헨티나]]로 건너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공연하였다. 이후 매네기기의 후원으로 2년간 돈 걱정 없이 이탈리아와 프랑스, 독일, 영국 등에서 공연을 하였다. 1949년 11월에는 칼라스의 최초의 판매용 음반을 체르타 음반사에서 녹음했다. 비용은 매네기기가 부담하였다.
 
[[1950년]] [[3월]]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레나타 테발디]] 대신 대역으로 투입되어 《아이다》의 타이틀 롤을 불렀으나 라 스칼라 극장 매니저 안토니오 기링겔리는기린겔리는 칼라스를 외면하였다. [[1951년]] [[1월]] 라 스칼라 극장의 시즌 개막공연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1951년부터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을 중심으로 활약하여 《[[노르마 (오페라)|노르마]]》, 《안나 보레나》, 《메데아》 등 발굴되지 않았던 명작에 출연하였으며, [[1952년]]에는 코벤트 가든의 초청을 받아 노르마, 토스카 등을 선보였다. [[1954년]] [[11월 1일]] [[시카고 오페라]] 극장에서 상영된 노르마(Norma)에서 노르마 역으로 미국에서 데뷔했고, [[1956년]] [[10월 29일]] [[뉴욕 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상영된 노르마에서도 캐스팅되었다. 이때 타임지는 어머니 에반겔리아와의 인터뷰 기사를 싣는다. 칼라스는 어머니 에반겔리아가 자신의 유년 시절을 빼앗아갔다고 자주 비난했고, 두번 다시는 어머니를 보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1957년 이후로는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에서 활약하였다.
 
==== 유럽 순회 공연 ====
[[1957년]] [[4월]] 마리아 칼라스는 남편 매네기기메네기니비스콘티와[[루키노 비스콘티]]와 함께 도니제티(Donizetti)의도니제티의 [[안나 볼레나]](Anna Bolena) 스토리를 읽고 시연을 기획했다. 시연 후 비평가들의 열광적인 호평을 받았다. [[1958년]] [[1월 2일]] 로마 오페라(Opera di Roma) 극장에서 이탈리아 대통령 그로니치조반니 그론키 앞에서 노르마를 공연했으나 몸이 좋지 않아 약을 먹고 공연하였으나, 통증과 약기운 등으로 공연 중간에 그만두게 됐다. 이때 [[이탈리아]]의 청중들은 화가 나서 그녀를 맹비난했다. 동시에 칼라스는 극장주와도 격렬히 싸우고 극장과의 관계를 청산했다.
 
[[1958년]] [[5월]] [[라 스칼라 극장]]에서 피에타 공연 중, 감독 안토니오 기린겔리와의 오랜 갈등으로 59년 말까지 남은 계약 기간동안 스칼라 극장에서 공연하지 않을 것을 결심했다. 그런데 58년 [[11월 6일]] 메트로폴리탄 극장의 루돌프 빙(Rudolf Bing) 총감독은 1959년 시즌에 칼라스를 투입하지 않기로 하고 해고를 통보해왔다. 남편인 매네기기는메네기니는 유럽의 콘서트를 알아보았고, 1958년 [[12월 19일]] 칼라스는 파리에서 파리 오페라(Paris Opera)의 콘서트에서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했다. 이후 오나시스 등의 명사들이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미국]]과 [[유럽]] 전지역의 극장에서 공연하거나 초청받았고 이탈리아 오페라, 프랑스 오페라, 독일 오페라, 영국 오페라와 현대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의 오페라와 뮤지컬에 주연과 조연으로 출연, 소화하였다. 성역이 넓고 성량도 풍부하며 레퍼토리도 다양하였다. 스케일이 큰 연기 및 가창표현, 비범한 발성 능력을 요구하는 다양한 배역을 소화해냈다. 그는 동시대의 소프라노 중 [[레나타 테발디]]와 종종 비교되었으며, [[토스카]]나 [[나비부인]] 등의 주연을 놓고 경합을 벌이기도 했다. [[1958년]] 파리 오페라제에 초청되었다. 당시 파리 공연 중 그는 [[그리스]]의 선박왕 [[아리스토틀애리스토틀 오나시스]]를 만나는데, 오나시스는 VIP석에서 그의 노래 모습을 지켜보다가 매료된다. 이후 오나시스는 그에게 계속 구애해왔다. 1963년 파리의 애비뉴 포크로 이주하였다.
 
1963년 6월 5일 파리에서 토스카 공연을 선보였다. [[1964년]] [[1월]] 콘벤트 가든에서 토스카를 공연했는데, 위대한 공연이라는 호평으르 받았다. [[1965년]] [[2월]] 프랑스 파리에서 토스카를 아홉 번 공연하고 3월에는 미국 뉴욕에서 토스카를 두 번, 5월에는 다시 파리에서 노르마를 다섯 번 공연하였다. 이때 피로를 느꼈으나 공연을 강행하였고, 공연을 취소하라는 의사의 충고에도 7월 콘서트를 강행한다. [[1965년]] [[7월 5일]] [[영국]]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상영된 [[토스카]]의 주연 토스카 역을 맡아보았고, [[1965년]]부터는 오페라 연출, 연기지도 등도 맡아보았다. 1966년 칼라스는 파리 외곽 36 오베르뉴 조지 멘델로 이주, [[1970년]]에는 영화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한 파졸리니의 영화 《메데아 Medea》에 출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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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allasAmsterdam1973a.jpg|thumb|left|140px|[[1973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순회공연]]
 
자신의 후원자이자 이탈리아 부호였던 지오반니 메네기니와 결혼생활 중 남편 메네기기와메네기니와 함께 참석한 한 연회장에서 [[아리스토텔리스 오나시스|오나시스]]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오나시스는 자신의 유람선에 칼라스, 매네기기메네기니 부부를 초청해 3주간 항해하였고, 칼라스는 그에게서 20벌의 드레스와 각종 신발, 장신구 등을 선물받았다. 칼라스는 남편이자 후원자였던 매네기기를메네기니를 버리고 오나시스와 동거하였다. 1960년 초에는 오나시스를 따라 상류사회의 생활과 사교계에 다니며 작품 활동이 뜸하였다.
 
칼라스는 먼저 메네기니와 이혼을 요구, 이혼 후 오나시스와 결혼하고자 하였으나 오나시스는 [[1963년]] [[존 F. 케네디]]와 재클린 내외를 자신의 유람선으로 초대한 뒤, 그해 [[11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미망인 [[재클린 케네디]]와 연인이 되고 칼라스는 이 무렵 아기를 유산하였다. 동시에 그의 목소리에 이상이 생겼고, 공연 도중에 또는 공연 사전에 연이은 공연 취소와 비난에 직면했다. 칼라스는 [[1965년]] 코벤트 가든에서의 '토스카'의 주연 토스카역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1966년]]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그리스]] 국적을 취득하였으나, 1968년 오나시스와 재클린의 결혼 이후 칼라스는 [[미국]] 국적을 다시 회복하고 [[프랑스]]로 건너가 은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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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영국]] [[런던]]에서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함께 리턴 투 마리아 칼라스 순회공연을 하였다. [[1974년]] [[10월]] [[한국]]을 방문, [[서울특별시]] [[이화여자대학교]] 강당에서 카르멘과 라 조콘다, 메피스토펠레스, 쟌니 스키키, 라 보엠, 토스카 등의 타이틀롤을 선보이고 [[프랑스]]로 돌아갔다가 [[11월 9일]] 일본측의 초청으로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비행기편으로 [[일본]] [[도쿄]]를 방문, 인터뷰 후 [[삿포로]]에서도 카르멘, 토스카 등을 선보였다. 그해 [[11월]] 말 디 스테파노와 연락을 끊게 되었다.
 
말년에는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렸고 [[프랑스]] [[파리 시]] 외곽 [[오베르뉴 조지 멘델]](Avenue Georges Mandel)의외곽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은둔하였으며 1976년 오나시스의 이혼 도중 사망 소식을 접했고, 그는 충격을 받고 고독과 공허함 등에 시달렸다. [[1977년]] [[9월 14일]] 우울증 약물 및 [[수면제]] 과다복용 등으로 인한 쇼크성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한때 자살설이 돌아, 극심한 고독에 의한 [[자살]]이라고도 하였다. 시신은 화장되어 납골당에 안치되었으나 여러 번 도난을 반복하다가 [[에게 해]]에 뿌려졌다. 그의 나이 55세였다.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