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칼라스: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26번째 줄:
=== 오페라 가수 생활 ===
==== 데뷔 초기 ====
[[1944년]] 7년만에 아버지 요르요스의요르고스의 편지를 접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3일]] [[아테네]]에서 솔로 리사이틀 겸 작별 콘서트를 하고 미국으로 갈 여비를 모았다. [[1945년]] [[9월]] [[미국]] [[뉴욕]]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였으며 단역을 전전했다. 그 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에 응모하였으나 주목받지 못하였고, 95kg의 거구가 지적받자 다시 다이어트를 시작하여 감량에 성공한다. 칼라스의 회고에 의하면 영화 [[로마의 휴일]]의 주연 [[오드리 햅번]]의 미모에 반한 것이 다이어트의 계기가 되었다 한다.
 
[[1946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의 단장 에드워드 존슨이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를 듣고 매료되어 메트로폴리탄의 1946년에서 1947년 시즌에서 베토벤의 피델리오와 푸치니의 나비부인의 주연 나비부인역을 제의했으나 마리아는 거절했다 피델리오를 영어로 부르는 것이 싫었고, 81Kg의 체중으로 15세의 가냘픈 여자 역할을 하는게 싫어서였다 한다. [[1946년]] 시카고 오페라단의 단장 바가로치는 말 이탈리아의 [[오타비오 스코토]]의 도움을 받아 시카고 오페라단을 되살리려는 프로젝트를 시작해서 세르조 파일로니(Sergio Failoni)의 지휘와 칼라스의 주연으로 투란도트를 연주하려고 기획했으나 [[1947년]] [[1월]] 공연을 몇 일 남기고 후원사인 시카고 컴퍼니의 파산으로 공연은 무산되었다.
32번째 줄:
[[1947년]] 초 시카고 컴퍼니사의 직원이었던 이탈리아 베이스 가수 니콜라 로시 레미니(Nicola Rossi Lemeni)에게서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의 예술 감독인 조반니 체나텔로(Giovanni Zenatello)를 소개받았다. 자나텔로는 칼라스의 노래에 매료되어 《[[라 조콘다]] (La Gioconda)》의 주연으로 캐스팅했다. [[1947년]] 칼라스는 오페라의 꿈을 포기하라는 주변의 권고를 물리치고 다시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6월 27일]] [[나폴리]]에 도착, 《[[라 조콘다]] (La Gioconda)》를 연습하였다.
 
[[1947년]] [[7월]]에 베로나 음악제에서 폰키엘리의 《[[라 조콘다]] (La Gioconda)》의 타이틀 롤을 불렀고, [[8월 3일]] [[베로나]]의 아레나에서 《[[라 조콘다]]》를 불러 [[이탈리아]]에서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한때 이탈리아인들이 일부 소프라노 등에게 붙이는 "라 디비나 (오페라의 성자)"라는 별칭을 받기도 했다. 공연은 성공적이었으나 별 인상을 남기지 못해 주목받지 못하다가, [[1947년]] [[12월]] 베니스에서 [[이탈리아어]]로 상영되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졸데역에 캐스팅되고, 바로 [[자코모 푸치니]]의 [[투란도트]]의 타이틀롤로 주목을 받아 재계약을 맺게 되었다. 베로나 아레나 공연에서 그의 재능을 알아본 조반니바티스타 메네기니는 그의 후원자가 되었다. 이후 주로 투란도트를 공연하였다.
 
==== 연애와 결혼 ====
한때 연극, 영화감독이었던 [[루치노루키노 비스콘티]]와 사랑에 빠졌으나 곧 결별하였다. [[1946년]] 조반니바티스타 메네기니(Giovanni Battista Meneghini)를 만나고, 메네기니는 곧 그의 팬이자 열렬한 후원자, 매니저가 되었다. [[1947년]] 28년 연상의 메네기니와 동거하다가 곧 결혼하였다. 메네기기는 그의 음반과 각종 활동비용을 후원하였고 칼라스는 노래와 오페라, 가극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1957년]] 선박왕 오나시스를 만나면서 먼저 이혼을 요구하여 이혼하였다.
 
결혼식 직후 친정어머니 에방겔리아는 내 딸 칼라스라는 책을 내 그를 인신공격하였다. 또한 방송에 출연한 에방겔리아는 "마리아같은 여자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영원히 행복하지 못할 것"이라며 비난을 쏟아냈다. 이후 칼라스는 친정 가족들과의 [[의절]]을의절을 선언하고 연락을 끊어버렸다. [[그리스]]에서의 데뷔를 포기한 칼라스는 미국, 이탈리아에서 데뷔를 시도한다. 이후 그는 마리아 메네기니 칼라스(Maria Meneghini Callas)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이혼 후 다시 마리아 칼라스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 이탈리아에서의 활동 ====
1947년 [[밀라노]]의 라 스칼라 오페라단에 입단하고, 《[[청교도]] (I puritani)》의 단역으로 캐스팅되었으나 주인공 엘비라 역으로 낙점된 [[마르게리타 카로시오]](Margherita Carosio)가 [[독감]]에 걸려, 예정에 없이 그가 캐스팅되었다. 대역으로 투입된 칼라스는 3일의 연습으로 무대에 섰는데 호평을 받았다. 이어 [[레나테 테발디]]가 갑자기 아프게 되어 [[아이다]]의 주연 아이다 역을 맡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때 스칼라 오페라단은 칼라스에게 아이다 역의 대역으로 투입했고, [[아이다]] 공연으로 크게 호평을 받으면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청교도》의 엘비라 역, 《아이다》의 아이다 역, 《토스카 Tosca》의 토스카 역 등을 소화해낸 뒤 《노르마》, 《람메르무어의 루치아(Lucia di Lammermoor)》 등의 주인공역으로 호평을 받았다. 특히 토스카 공연 중에는 열연하던 중 가발에 불이 붙었으나 끝까지 아리아를 부르기도 했다.
 
[[1948년]] 베니스, 로마, 제노바 등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투란도트, 레오노라를 공연하고 1948년 연말에는 아이다와 노르마 등을 주로 하였다. 1948년 11월 30일 피렌체의 테아트로 코뮤날레에서코무날레에서 공연한 노르마는 흥행하였다. [[1949년]] 초, 브룬힐데의 브룬힐데 역을 11일간 하였다. [[1949년]]에는 [[베니스]]에서 활동하였으며 [[4월 21일]] [[베로나]]에서 메네기니와 정식 결혼식을 올린 뒤 [[아르헨티나]]로 건너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공연하였다. 이후 메네기니의 후원으로 2년간 돈 걱정 없이 이탈리아와 프랑스, 독일, 영국 등에서 공연을 하였다. 1949년 11월에는 칼라스의 최초의 판매용 음반을 체르타 음반사에서 녹음했다. 비용은 메네기니가 부담하였다.
 
[[1950년]] [[3월]]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레나타 테발디]] 대신 대역으로 투입되어 《아이다》의 타이틀 롤을 불렀으나 라 스칼라 극장 매니저 안토니오 기린겔리는 칼라스를 외면하였다. [[1951년]] [[1월]] 라 스칼라 극장의 시즌 개막공연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1951년부터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을 중심으로 활약하여 《[[노르마 (오페라)|노르마]]》, 《안나 보레나볼레나》, 《메데아》 등 발굴되지 않았던 명작에 출연하였으며, [[1952년]]에는 코벤트 가든의 초청을 받아 노르마, 토스카 등을 선보였다. [[1954년]] [[11월 1일]] [[시카고 오페라]] 극장에서 상영된 노르마(Norma)에서 노르마 역으로 미국에서 데뷔했고, [[1956년]] [[10월 29일]] [[뉴욕 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상영된 노르마에서도 캐스팅되었다. 이때 타임지는 어머니 에반겔리아와의 인터뷰 기사를 싣는다. 칼라스는 어머니 에반겔리아가 자신의 유년 시절을 빼앗아갔다고 자주 비난했고, 두번 다시는 어머니를 보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1957년 이후로는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에서 활약하였다.
 
==== 유럽 순회 공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