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르미도르의 반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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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뱅파]]가 [[1793년]]부터 [[1794년]] 사이에 프랑스 내외의 전란을 수습한 후 국민은 [[공포 정치]]에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1794년]] 봄에 [[에베르 파]]와 [[당통 파]]가 숙청을 당하면서 자코뱅파의 일부는 [[국민 공회]]의 중도파와 긴밀하게 협력하여 로베스피에르를 타도하려고 했다. 또한, 공포 정치의 선봉으로 파리보다 더 심한 탄압을 했던 지방 파견 의원([[조제프 푸셰]], [[장 랑베르 탈리앵]] 등)들은 로베스피에르의 추궁을 두려워하여 선제공격을 계획하고 있었다.
 
한편, 공포 정치의 중심이었던 [[공안위원회 (프랑스 혁명)|공안위원회]]도 로베스피에르 파(로베스피에르, [[생 쥐스트]], [[쿠통]])과 전란 수습으로 세력을 확장한 온건파([[라자르 카르노]] 등)으로 분열되었다. 그것그것이 싫증이 난 로베스피에르는 6월 중순부터 [[7월 26일]]까지 공개석상에는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에도 반대파의 음모는 진행되고 있었다. [[7월 22일]]에는 대립 관계에 있던 《[[공안위원회 (프랑스 혁명)|공안위원회]]》와 《[[보안위원회]]》의 합동회의가 열렸지만, 로베스피에르는 더 이상 생 쥐스트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 사건 전개와 영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