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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 행정 ===
 
경제 산업분야에선, 부국강병, 식산(殖産)흥업의 슬로건 아래, [[도미오카 제사장]]을 비롯한 관영공장이 만들어지는 등, 정부 주도의 산업 육성이 시작되어, 서양식 공업 기술이 도입되었다. 금융제도에서도 통화단위로 '[[일본 엔|엔]]'을 도입(1871년), 국립은행 조례에 의한 국립은행(내셔널 뱅크)을 거쳐, 통화 발행권을 독점하는 [[중앙은행]]으로써 [[일본 은행]]을 설립(1882년) 하는 등, 자본주의적 금융제도의 정비도 이루어졌다. 유통 분야에서는, 우편제도, 전신망의 정비, 철도 및 선박 운수(민간 우편 기선 미쓰비시 회사와 국책 회사인 공동 운수 회사의 경합을 거쳐 [[일본 유센]] 회사가 되었다.)등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자본 활동에는, 실직한 대신 녹봉을 얻은 [[화족]]의 자산에 의한 투자 활동도 배경에 있었다.
=== 여러 제도의 개혁 ===
[[폐번치현]](번을 폐지하고 모두 현으로 바꾸는 것)과 태정관 제도의 개혁을 거쳐 중앙집권 체제가 갖추어짐으로써, 간신히 옛 막부 시대의 제도를 개혁할 준비가 갖추어졌다. 거의 동시에 궁중 개혁도 이루어져, 구래의 궁중직이나 궁녀 폐지, [[사족]]을 중심으로 한 시종등이 [[메이지 천황]]을 개혁 군주에 어울리는 천황으로 양육하게 된다. 막부 말기에는 병약했던 메이지 천황도, 사족에 의한 양육 때문인지 건강도 회복하여, 서양식 입헌 군주로서의 마음가짐도 배워, '메이지 국가' 원수로 어울리는 존재가 되어 갔다. 특히 헌법 제정 과정에서의 추밀원 심의에 모두 참석하였고, 또 국회 개설 전후 입헌 정치 미성숙기에 수상이 빈번하게 사임, 교대했을 때에도 정국의 조정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신분 제도에서는, 에도 막부 아래의 '[[사농공상]]'의 구별을 폐지, 구 무사 계급을 [[사족]], 그 이외를 [[평민]]으로 하여, '사민평등'을 구가하는 한편, 구 [[구게]], [[다이묘]]나 일부 승려등을 새롭게 [[화족]]으로서 특권 계급으로 함과 동시에, [[일본 궁내성|궁내성]] 지배 아래로 두게 되었다.
 
또한, 유신 정부는 서양의 여러 제도를 연구하기 위해 [[이와쿠라 도모미]]를 정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등을 부사로 하는 [[이와쿠라 사절단]]을 구미에 파견하지만, '잔류 정부'로 불리며 일본에 남은 [[사이고 다카모리]], [[이노우에 가오루]], [[오쿠마 시게노부]], [[이타가키 다이스케]], [[에토 신페이]], [[오키 다카토]]등에 의해서, 차례차례로 개혁은 진행되어 갔다.
 
주 개혁으로는 학제(学制) 개혁, 지조(地租) 개정, 징병령, [[그레고리력]] 채용, 사법 제도 정비, [[단발령]]등이 있다. 다만, 이런 개혁은 급격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모순도 적지 않았고, 사족이나 농민의 불만을 사서, 후에 [[정한론]]으로 이어졌다 라고도 말해진다. 구미 사절에서 귀국한 이와쿠라나 오쿠보가 정한론을 지지하지 않았고, 더욱 더 오쿠보 밑으로 [[일본 내무성|내무성]]이 설립됨으로써 여러 개혁의 정리가 이루어지게 된다.
 
또한, 같은 시기에 민간에서 이루어진 문명 개화의 움직임, 육식 보급과 철도 개통 등과 함께, 신시대 '메이지'의 분위기가 양성되었다.
 
경제 산업분야에선, 부국강병, 식산(殖産)흥업의 슬로건 아래, [[도미오카 제사장]]을 비롯한 관영공장이 만들어지는 등, 정부 주도의 산업 육성이 시작되어, 서양식 공업 기술이 도입되었다. 금융제도에서도 통화단위로 '[[일본 엔|엔]]'을 도입(1871년), 국립은행 조례에 의한 국립은행(내셔널 뱅크)을 거쳐, 통화 발행권을 독점하는 [[중앙은행]]으로써 [[일본 은행]]을 설립(1882년) 하는 등, 자본주의적 금융제도의 정비도 이루어졌다. 유통 분야에서는, 우편제도, 전신망의 정비, 철도 및 선박 운수(민간 우편 기선 미쓰비시 회사와 국책 회사인 공동 운수 회사의 경합을 거쳐 [[일본 유센]] 회사가 되었다.)등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자본 활동에는, 실직한 대신 녹봉을 얻은 [[화족]]의 자산에 의한 투자 활동도 배경에 있었다.
 
이러한 개혁에는 적극적으로 서양 문명의 선진 제도가 받아들여지는 과정에서, '[[외국인 초빙사|오야토이 외국인]]'이라고 불리는 외국인이, 기술 지도, 교육 분야, 관제, 군제 정비등 여러가지 분야에서 고용되어 근대국가 건설을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