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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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전래되기 전의 이베리아는 1세기 부터 [[미트라교]]와 [[조로아스터교]]의식이 거행되었다. 미트라교의 의식은 통합적인 성격과 뒤따르는 지역 의식들의 상호 보완, 특히 태양 숭배에 의해 다른 종교와 구별되었고, 점진적으로 고대 조지아인들(그루지야인들)의 믿음을 덧붙혀 나갔다.<ref> GOCHA R. TSETSKHLADZE "Georgia" ''Encyclopedia Iranica'', Columbia University [http://www.iranica.com/newsite/articles/v10f5/v10f504c.html] retrieved July 2, 2007 </ref> 서조지아(서그루지야)의 이베리아 왕국은 [[이베리아의 미리안 3세|미리안 3세]]왕이 [[기독교]]를 공식적인 왕국의 종교로 확립한 [[327년]]<ref> Theodor Dowling, ''Sketches of Georgian Church History'', New York, 1912, p 37 </ref><ref> Charles Burney and David Marshal Lang, ''The Peoples of the Hills: Ancient Ararat and Caucasus'', p. 22 </ref><ref> Allen, W.E.D.: ''A History of the Georgian People'', 1932, p. 64 </ref>에 개종하여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 중에 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국교로 인정된 연대는 317년,<re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in Georgia'', Besiki Sisauri, p. 34 </ref> 324년<ref>''The Making of the Georgian Nation'', Ronald Grigor Suny, p. 20 </ref> 등으로 나타낸 많은 기록들과 역사 문서들을 기반으로 수정된다. [[조지아 연대기|조지아(그루지야) 연대기]]에 따르면, [[카파도키아]]의 [[성녀 니노]]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재위 기간 중인 330년에 조지아(그루지야)를 기독교로 개종시켰다고 한다. 4세기 중반이었지만, 라지카(옛 이베리아 왕국)과 이베리아는 모두 기독교를 그들의 공식적인 종교로 채택하게 된다. 4세기와 대부분의 5세기 기간동안에, 이베리아(카르틀리 왕국으로도 알려짐)는 페르시아의 통제 하에 있게 됐다. 왕국은 폐지되었고 나라는 [[샤|샤흐]]에 의해 임명된 통치자에 의해서 통치되었다. 5세기말 이었기는 했지만, [[바흐탕 1세 고르가살리]] 왕자는 그 스스로 왕임을 선언하여 반-페르시아 반군을 편성했고 이베리아 왕국을 복원하였다. 그 다음에, 바흐탕의 군대들은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제국]]에 대항하여 다양한 군사 작전들을 착수했다. 그러나 조지아(그루지야) 왕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한 그의 투쟁은 지속되는 성공을 이어가지 못하였다. 502년에 바흐탕이 죽고, 그의 아들 [[이베리아의 다치|다치]](502~514)의 짧은 통치 기간 이후에, 이베리아는 한때 페르시아의 속주로 재합병되었다. 그러나 그 때 이베리아 귀족들은, 조지아(그루지야)에서 ''에리스므타바리''로 불리는, 통치자들을 선출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7세기 후반에, [[중동]]을 차지하려던 비잔티움-페르시아 경쟁은 그 지역의 아랍 정복으로 대체되었다.
 
== 중세 조지아(그루지야) ==
{{본문|조지아 왕국}}
=== 조지아(그루지야) 왕국의 통일 ===
[[파일:Bagrat III of Georgia (Gelati mural).jpg|thumb|left|통일 조지아(그루지야)의조지아의 첫 번째 왕, [[바그라티오니]] 왕실의 [[조지아의 바그라트 3세|바그라트 3세]]]]
[[파일:Bediacup.jpg|thumb|250px|right|[[조지아의 바그라트 3세|조지아(그루지야) 바그라트 3세]]의 베리아 컵, 999년]]
9세기의 첫 10년은 [[타오-클라르제티]]에서 새로운 조지아(그루지야) 왕국의 떠오름을 보았다. [[바그라티오니]] 왕가의 [[아쇼트 1세 쿠로팔라테스|아쇼트 쿠로팔라테스]]는 [[아랍인|아랍]]으로부터 남이베리아의 옛 영토들을 해방시켰다. 그 영토들은, "이베리아의 쿠로팔라티나테"의 이름 아래 형식상 [[비잔티움 제국]]의 일부 였던 타오와 클라르제티, 그리고 [[샤브셰티]], 키카타, 삼트스케, [[트리알레티]], [[자바케티]]의 백작들의 공국들을 포함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지역은 [[아르타누지]]의 수도와 더불어 완전히 독립된 나라로 기능했다. [[쿠로팔라테스]]의 세습 칭호는 거의 한 세기동안 가문의 대표자들이 타오-클라르제티를 통치했던 바그라티오니 가문에 의하여 유지되었다. 쿠로팔라테 다비트 바그라티오니는 데오도시오폴리스(카린, 카르누칼라키)의 도시와 아르메니아 속주 [[바시아니]]의 병합에 의해, 그리고 한때 아랍 태수 [[카이시데]]에의 해 통제 되었던 아르메니아의 속주들인 카르퀴, 아파쿠니, 만트시케르트, 칼라트를 통틀어 보호 제도를 도입함으로 다비트는 그의 영토를 확장했다.
[[파일:Map Byzantine Empire 1045 2000px svg.png|thumb|250px|비잔티움 제국 시대의 조지아(그루지야), 1045년]]
첫 번째 통일 조지아(그루지야) 군주국은 [[타오의 다비트 3세|쿠로팔라테 다비트]]가 카르틀리-이베리아의 백작령을 그의 왕국으로 가져오던 10세기 말에 형성되었다. 3년 후에, 그의 삼촌 [[맹인 데오도시우스]]가 죽고, 에그리시-압하지야의 왕 [[조지아의 바그라트 3세|바그라트 3세]]는 압하지야의 왕좌를 승계했다. 1001년에 바그라트는 다비트가 죽은 결과로 타오-클라르제티(이베리아의 쿠로팔라티나테)를 그의 영토에 더했다. 1008~1010년에, 바그라트는 [[카케티]]와 헤레티를 합병했고, 그리하여 그는 조지아(그루지야)의조지아의 동부와 서부를 모두 통일한 첫 번째 단일 왕이 되었다.
 
11세기의 1반기는 1040년대 말에 중앙 아시아와 페르시아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광대한 유목민 제국의 건설에 성공한 [[셀주크 왕조|셀주크 투르크]]의 전략적으로 중요한 침입에 의해 표징된다. 1071년에, 셀주크 군대는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연합된 비잔티움-아르메니아와 조지아(그루지야)의조지아의 병력들을 초토화시켰다. 1081년에, 아르메니아, [[아나톨리아]], [[메소포타미아]], [[시리아]]의 전부들과, 조지아(그루지야)의조지아의 대부분이 셀주크에 의해 정복당했고 황폐화 되었다. 조지아(그루지야)에서는조지아에서는 [[압하지야]], [[스바네티야]], [[라차]]와 [[케비]]-[[케브수레티]]의 산악 지역들만이 셀주크의 통제 밖에 남아있었고 수많은 피난민들의 상대적으로는 안전한 피난처로 구실했다. 나라의 나버지 지역은 도시들과 요새들을 파괴했고 마을들을 약탈했으며 귀족들과 농민들 모두를 학살하던 정복자들에 의해서 지배되었다. 1080년대 말에는, 사실상, 그 지역에는 조지아인들(그루지야인들)보다조지아인들보다 침략자들의 수가 더 많았다.
 
=== 건설자 다비트 4세와 조지아(그루지야) 국토회복운동 ===
[[파일:King David Aghmashenebeli.jpg|right|thumb|200px|건설자 다비트 왕, 쉬오-므그비메 수도원]]
조지아(그루지야)에서조지아에서 [[셀주크 왕조|셀주크]] 침입자들에 대항한 투쟁은 부친 게오르게 2세 바그라티오니가 퇴위하고 1989년 16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한 바그라티오니 왕가의 젊은 [[조지아의 다비트 4세|다비트 4세]]가 이끌었다. 왕위를 승계한 직후 곧바로 권력을 잡은 다비트는 정규군과 농민군을 만들었다. 아나톨리아와 시리아에서 셀주크 투르크에 대항한 첫 번째 십자군(1096~1099)과 십자군의 공격은 조지아(그루지야)에서조지아에서 다비트의 성공적인 군사 작전을 선호했다. 1099년 말에, 다비트는 셀주크에게 공불을 갖다 바치는 것을 그만 두게 되었고 [[트빌리시]]와 [[헤레티]]를 제외한 조지아(그루지야)의 영토 대부분을 해방시키게 되었다. 1103년에 그는 [[조지아 정교회|조지아(그루지야) 정교회]]를 재정립했고 조지아(그루지야)의조지아의 정부 총리(므트시노바르트 우쿠트세시)를 [[카톨리코스]](대주교)로 임명하여 왕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1110~1118년 사이에 다비트는 로리, 삼슈빌르데, 루스타비, 그리고 저지대의 카르틀리와 타쉬리의 요새들을 차지했고, 그로인해 트빌리시는 셀주크의 고립 영토로 전환 되었다.
[[파일:KingDavidtheBuilderFlag.svg|thumb|150px|left|건설자 다비트의 통치 기간 동안의 조지아(그루지야) 국기]]
1118~1119년에, 터키 유목민들이 철수한 결과로 상당한 양의 무료에다가 정착이 안된 토지들이 많았고,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격의 인력들이 절박하게 필요했기 때문에, 다비트 왕은 [[북캅카스]]로 부터 4만명 정도의 [[킵착|킵차크]] 전사들을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조지아(그루지야)에조지아에 정착하게 하려고 초대했다. 1120년에 알라니아의 통치자는 스스로를 다비트의 봉신으로 인식했으며 그 후 수쳔명의수천명의 알란인(주장된 바에 의하면 현대 시대의 오세트인)들이 중심 캅카스의 경계를 가로질러 조지아(그루지야)의조지아의 내부로 보내졌다. 그들은 조지아(그루지야)의조지아의 카르틀리에 정착했다. 조지아(그루지야)의조지아의 왕실 군대는 독일, 이탈리아, 스칸디나비아{서방에서 사는 모든 이들을 조지아(그루지야)에서는조지아에서는 "프랑크인"이라고 정의 되었었음}에서 뿐만 아니라 키예프 공국에서 보수를 목적으로 복무하러 온 사람들도 환영했다.
[[파일:Queentamar giorgi.jpg|300px|thumb|타마르 여왕과 그녀의 부친 [[조지아의 게오르게 3세|게오르게 3세]] 왕([[베타니아 수도원]]으로부터 복원된 벽화)]]
1121년, 셀주크 술탄 마흐무드는 조지아(그루지야)에조지아에 [[지하드]]를 발령하고 조지아(그루지야)와조지아와 전투를 벌이기 위해 그의 유명한 장군 중에 한명인 [[를리그하지]]와 휘하의 강력한 군대를 보냈다. 투르크의 군사들의 수가 분명히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지아는 [[디드고리 전투]]에서 침략자들을 훌륭히 무찔렀고, 1122년에는 그들은 토빌리시를 수도로 삼았다. 3년 후에 조지아(그루지야)는조지아는 쉬르반을 정복했고, 그 결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는 서부 쉬르반(한때 번영하고 있던 알바니아 왕국의 흔적)의 [[그히쉬-카발라]] 지역은 조지자에 의해서 합병되었다. 반면에 이미 이슬람교화 된 쉬르반의 나머지 지역은 조지아(그루지야)의조지아의 의존국이 되었다. 같은 해에 아르메니아의 광대한 부분이 다비트의 대군에 의해 해방되었고 뿐만 아니라 조지아(그루지야)의조지아의 손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124년에 다비트는 남아르메니아가 조지아(그루지야) 왕권의 영토로 편입한 아르메니아의 왕이되었다. 1125년에 다비트는 강력한 지역 권력의 지위를 가진 조지아(그루지야)를조지아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조지아(그루지야)에서조지아에서, 다비트 왕은 아그마셰네벨리(건설자, {{llang|en|The Builder}})로 불린다.
 
다지드 아그마셰네벨리의 계승자들(데메테르 1세, 다비트 5세, 게오르게 3세 왕들)은 북캅카스의 대부분의 산악 씨족들과 부족들을 경시하고 더 나아가 쉬르반에 조지아(그루지야)의조지아의 입지를 확고히 하며 조지아(그루지야)의조지아의 확장 정책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 기간에 조지아의 가장 명성 높은 주권자는 확실히 [[타마르 여왕]](다비트의 증손녀)이다.
 
=== 여왕 타마르 대제와 1184~1123년의 황금 시대 ===
[[파일:Tamar's fresco at Betania.jpg|thumb|upright|left|조지아(그루지야)의조지아의 타마르 여왕]]
[[타마르 여왕]]의여왕의 통치는 국가의 역사 전체에서 일지도 모르는 조지아(그루지야)의조지아의 절정을 상징한다. 1194~1204년에 타마르의 군대들은 남쪽과 남쪽에서 온 새로운 터키군의 침략을 눌러 부쉈다. 터키가 통제하던 남아르메니아 방면으로 다양한 성공적인 군사 작전을 펼쳤다. 그 결과, [[카린]], [[에르지니안]] [[켈렛]], [[무슈]]와 [[반 (터키)|반]] 도시들을 포함하는 대부분의 남아르베니아 대부분을 조지아(그루지야)의조지아의 통제권 아래로 가져왔고, 남아르메니아가 조지아(그루지야)의조지아의 보호국이 됨으로, 터키의 현지 에미르와 술탄의 이름뿐인 통치아래 남겨졌다.
[[파일:Geor tamro aandersen.png|250px|thumb|조지아(그루지야) 왕국의 군사 지배 전성기, 1184~1225년]]
1204년에 십자군으로 인한 비잔티움 제국의 일시적인 몰락으로 조지아(그루지야)는조지아는 전체 동부 지중해 영역권에서 가장 강력한 기독교 왕국으로 남았다. 같은해 타마르 여왕은 아티나, [[리자]], [[트레비존드]], [[케라순트]], [[아미소스]], [[코티오라]], [[헤라클레아]]와 [[시노파]] 도시들이 있는 이전 비잔티움의 라조나와 파리아드리아를 차지하기 위해 그녀의 군사들을 보냈다. 1024년에, 점유된 영토는 조지아(그루지야)에조지아에 의지하는 [[트레비존드의 제국]]으로 바뀌었다. 타마르의 친척인 [[트레비존드의 알렉시오스 1세|알렉시오스 콤네노스]] 왕자는 그 제국의 왕좌에 앉았다. 1210년에 조지아(그루지야)의조지아의 군대들은 남부 페르시아(현재 이란인의 아제르바이잔)에 침략했고 조지아(그루지야)의조지아의 보호 제도 하에 정복된 영토의 일부분으로 배치한, [[마란드]], [[타브리즈]], [[아르다빌]], [[쟈니안]]과 [[콰즈빈]] 도시들을 차지했다. 그러함은 그녀의 역사 전체에 걸쳐 조지아(그루지야) 최대의 영토 확장이었다. 타마르 여왕은 "압하지야, 카르트벨스, 란스, 카크스, 아르메니아, 쉬르반-샤키네, 샤키네-안의-샤크의 여왕이며, 동과 서의 주권자"로 호칭되었다. 조지아(그루지야) 역사가들은 종종 그녀를 "여왕 타마르 대제"로 기술했다.
 
12세기 초반 ~ 13세기 초반 사이와, 특히 타마르 대제의 시대는, 진정하게 조지아(그루지야)의조지아의 황금시대라고 여겨질 수 있으며, 게다가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그녀의 업적들과 더불어 건축, 문학, 철학과 과학을 포함하는 조지아(그루지야) 문화의 발달로 상징된다.
 
== 몽골의 침략과 조지아 왕국의 멸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