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시 비시 셸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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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영국의 명문 출신으로 [[이튼 스쿨|이튼]]을 거쳐 [[옥스퍼드 대학]] 재학 중 [[무신론]]을 부르짖다 퇴학 당하였다. [[1808년]] 이후부터는 [[이탈리아]]에서 지냈다. 그의 [[시 (문학)|시]]는 흔히 관념적으로 달콤하다는 평을 받으나, 그의 순수한 서정시는 어떤 형으로든지 이상주의 적 혁명에 대한 정열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품으로 극시 《사슬에서 풀린 프로메테우스》와 《서풍에 부치는 노래》, 《구름》 등이 있다.
 
== 결혼, 시인 바이런과의 교우 ==
1811년 여름 해리엇 웨스트브룩이라는 16세의 소녀와 결혼하였다. 무정부주의자이며 자유사상가인 W.고드윈의 강력한 영향을 받아, 정치적 이상을 노래한《매브 여왕 (Queen Mab)》(1813)을 발표할 무렵, 고드윈의 딸 메리와 친해졌고, 애정 생활의 파탄을 비관한 해리엇은 1816년 투신 자살했다. 그 해 메리와 정식 결혼한 그는 스위스를 여행, 시인 바이런과 알게 되어 교우관계가 시작되었다.
 
== 그 후의 작품들 ==
이 무렵의 작품은 ‘고독한 영혼’이란 부제가 붙은 서사시《고독한 영혼 Alastor》(1816), 정치시《이슬람의 반란 The Revolt of Islam》(1818), 플라톤의《향연》의 번역 등이다. 영국정부를 비판한《무질서한 가면극》(1819)과 워즈워스를 풍자한《피터 벨 3세》(1819)에 이어서, 16세기 로마에서 일어난 근친상간과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시극 대작《첸치 일가》(1819)와 대표작《사슬에서 풀린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Unbound》(1820)를 발표하였다. 이 대표작이 발표되던 해에 셸리 부처는 이탈리아의 피사에 정착하였고,《서풍의 노래 Ode to the West Wind》(1820)《종달새에 부쳐》 등 탁월한 서정시를 발표하였다. 1821년에는 이상적인 사랑을 노래한 시《에피사이키디온》, 그리스 독립전쟁에 촉발된 《헬라스 (Hellas)》, 시인 존 키츠의 죽음을 슬퍼하는 애가《애도네이스 Adonais》, 시인의 예언자적 사명을 선언한 시론으로 유명한 《시의 옹호》(1821) 등이 쓰여졌다. 
 
== 최후 ==
[[1818년]] 이후 이탈리아에서 머문 그는 1822년 7월 8일, 이탈리아의 나폴리 만(灣)에서 요트를 타다가 폭풍을 만나 익사하였다. 향년 30세
 
== 사후 ==
[[1824년]] 그의 사후 메리 셸리에 의해 출간된 유작시집 유작시선 《퍼시 비시 셸리, 유고시선집》(''Percy Bysshe Shelley, Posthumous Poems, ed. Mary Shelley'')에도 〈탄식〉(''A Lament'')과 같은 많은 좋은 시들이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