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유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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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유용은 정치적으로 뛰어난 인물이며, 명나라 성립 후에 중서성의 관리로부터 좌승상(左丞相)까지 출세를 하였다. 그러나 주원장이 거병 했을 때에 활약한 공신인 유기(劉基)를 몰아내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일파를 철저하게 탄압하고 전횡을 다했기 때문에, 주원장이 그를 멀리하게 되었다. 또 유기가 병사하자, 호유용에 의한 독살이라는 의혹이 일어나 의심이 심한 주원장은 호유용에 더 멀리하게 하고, 불신감이 심해졌다.
그리고 [[1380년]] 호유용은 [[북원]]과 일본에게 내통하여 모반을 일으키려고 기도한 죄에 의해, 홍무제에 의해서 처형되었다. 이 때, 연좌죄로 의해 호유용의 무리들이 모두 살해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홍무제 주원장의 숙청 사건의 하나인 [[호유용의 옥]](胡惟庸─獄)이다. 이 후, 1390년에는 이선장도 호유용의 모반음모와 관계가 있다고 추궁 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이 [[옥사]](獄事)에 [[연좌]](連坐)되어 [[처형]](處刑)된 사람은 무려 3만 명에 달한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는 호유용이 모반을 입증하는 증거는 적기 때문에 이것은 홍무제 주원장이 권력에 방해가 되는 신하를 숙청을 행하기 위한 구실로 여겨진 것은 아닐까도 의심되고 있다. 또 이 사건으로 중서성은 폐지되고, 황제의 입지가 강화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