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규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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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고종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흥이고 자는 경원(景圓)이며 호는 황사(黃史)인데 지당(芝堂)이라 사호(賜號)받았다. 민유중의 6세손이자 민상섭(閔相燮)의 손자이며 민치오(閔致五)의 아들이다. 1858년(철종 9)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인 1859년(철종 10) 문과급제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에 의해 중용되기 시작하여 1867년(고종 4) 이조참의로 등용되었으며, 이조참판을 거쳐 한성부우윤을 지냈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하야하자 국정을 장악하고 민씨 일족(一族)의 대표적 정객(政客)으로 정권에 깊숙이 참여하였다.
 
[[고종]]은 민승호에게 충정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런데 민승호에겐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민비는 가까운 친척을 배척하고 촌수가 좀 먼 [[민태호]]의 아들 민영익을 양자로 삼겠다고 했다.<ref name="hwang40">황현, 《매천야록》 (정동호 역, 일문서적, 2011) 40페이지</ref> 그러자 [[민태호]]는 반대하였고 그의 동생 [[민규호]]가 형을 협박했다. "천의(왕후의 뜻)를 어찌 감히 어기겠소? 양자를 보내어 함께 부귀를 누리는 것도 좋지 않겠소이까?" 그래서 [[민태호]]의 아들 영익은 [[민승호]]의 양자로 들어갔고, 뒤이어 [[민규호]]는 [[이조판서]] 겸 도통사가 되었다.<ref name="hwang40"/> 그 뒤 [[1878년]] 와병 중 [[의정부]]영의정이 되었다가 다시 우의정으로 고쳐 임명되었으나, 7일만에 죽었다. 예서, 행서, 초서 등 글씨에 능하였다. 충헌(忠獻)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그 뒤 [[1878년]] 와병 중 [[의정부]]영의정이 되었다가 다시 우의정으로 고쳐 임명되었으나, 7일만에 죽었다. 예서, 행서, 초서 등 글씨에 능하였다. 충헌(忠獻)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 가족 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