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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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트교 개종과 불가리아 대주교구 ==
그가 왕위를 계승했을 무렵 불가리아는 [[크룸]]과 프레지안의 노력으로 영토나 군사적·정치적 잠재력 면에서 유럽의 손꼽히는 국가였다. 그러나 당시 불가리아 내에는 [[슬라브족]]들이 7세기말 발칸 반도에 정착한 투르크계 종족인 [[불가르인]]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슬라브인들과 불가리아인들은 종교·인종·언어가 달랐으므로 모든 국민에게 공통적이고 의무적인 종교를 도입하는 일은 통일 불가리아 형성을 위한 기본적 전제조건 가운데 하나였다. 비(非)그리스도교 국가였던 불가리아는 '그리스도교 국가군'에 합류해야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교권에서는 [[로마 가톨릭]]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동방정교회]]라는 2개의 중심이 경쟁하고 있었으므로 보리스는 선택이 매우 어려웠다. 그는 원래 로마 가톨릭교를 받아들이려 했으나 비잔틴과 싸워 지자 콘스탄티노플의 동방정교회를 택해야 했다(864). 어느날 밤 그와 그의 가족 및 그의 정책을 지지하는 귀족들은 불가리아의 수도 플리스카에 파견된 비잔틴의 주교와 사제로부터 비밀리에 세례를 받았다(보리스의 세례명은 미하일). 그가 국민에게 세례를 강요하자 귀족과 평민이 모두 심하게 반발해 비그리스도교도들은 반란을 일으켰으며, 그는 52명의 보야르(귀족)들을 그들의 가족과 함께 처형했다. 그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포티우스는 불가리아 주교구의 지위에 대해 협상을 벌였으나 불가리아인들이 기대한 결과는 거두지 못했다. 비잔틴측은 불가리아 교회 조직이 완전히 콘스탄티노플에 종속되기를 바랐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보리스는 서유럽과의 외교접촉을 재개해, 866년 교황 니콜라우스 1세와에게 외교사절을 보냈다. 교황은 이에 화답해 곧 불가리아에 전도단을 파견했다. 로마 가톨릭 성직자의 불가리아 체류는 곧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던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민감한 쟁점이 되었다. 그러나 교황 니콜라우스 1세와 그의 뒤를 이은 하드리아누스 2세가 불가리아 내의 교회 조직에 관해 망설이고 있음이 드러나자 보리스는 다시 비잔틴과의 협상을 시작했다. 불가리아 교회 문제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제8차 공의회(869~870)에서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 불가리아는 공식적으로 명목상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관할하에 놓이게 되었지만 독자적인 대주교구를 갖게 되었다. 882년까지 로마 교황들은 보리스를 로마 교회 쪽으로 되돌리려고 호소하기도 하고 몇 가지 양보를 약속하기도 했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 보리스는 적극적으로 불가리아 국민들에게 크리스트교 신앙을 전파했고 불가리아 교회를 독립기구로 조직하는 일과 곳곳에 교회를 짓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다.
 
== 말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