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황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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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좌령 나이포(那爾布)의 딸이다. 건륭제의 친왕 시절에 [[측복진]](側福晉: 정식 첩, 양첩)으로 출가했다. 건륭제가 황위에 오르자 건륭 2년에 한비(嫻妃)로 책봉됐다가, 건륭 10년에 귀비(貴妃)로 진봉했다. 건륭 13년(1748년), 건륭제의 원후(元后)인 [[효현순황후]]가 사망하자 황후 내정자로서 [[황귀비]]로 봉해졌으며, [[효현순황후]]의 국상을 마친 건륭 15년에 황후로 책립되었다. 건륭 30년에 폐위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건륭제가 조강지처였던 [[효현순황후]]를 잊지 못했으며, 계황후가 평소 건륭제의 미움을 사는 일이 많았는데 심지어 건륭제가 보는 앞에서 머리카락을 자르기도 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여러후궁들을 질투를 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총애받던 [[하귀비]]와 향비, 건륭 31년에 병으로 사망하자 특별히 황귀비의 예우로 상장이 치러졌다. 폐후(廢后)였던 탓에 황후의 시호를 얻지 못했으며, 당시 건륭제의 유일한 적자였던 황12자 영기의 생모<ref group="註">앞서 [[효현순황후]]가 두 적통 황자를 생산했으나 모두 일찍 사망했다. 계황후는 영기 외 차남 영경도 출산했으나 영경은 건륭 22년에 조졸해 건륭 30년 당시 건륭제의 적자는 영기가 유일했다.</ref>였던 탓인지 서인으로 강등되었어도 준국모인 황귀비의 예우를 받았고 이후 강희 연간 30년 동안 황후의 위(位)가 공석이었던 특별한 사례였기에 사서엔 황후 오라나랍씨 혹은 계황후로 소개하고 있다. 그녀가 폐출된 후 그녀의 후임으로 영귀비 위가씨(훗날의 [[효의순황후]])가 [[황귀비]]로 진봉되어 육궁을 통솔하였으나 황후로 책립되진 못하였다.<ref group="註">사후 아들 [[가경제]]가 황위에 오른 뒤에야 황제의 생모 자격으로 황후로 추존되어 [[효의순황후]]가 되었다.</ref>
 
== 황제의 딸에서의 계황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