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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amhung 127.54085E 39.91185N.jpg|thumb|[[미국항공우주국]] ''World Wind''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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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성덕왕|성덕왕]] 20년에 사건을 기록한 《[[삼국사기]]》 제8권에 의하면, "하슬라주(오늘날의 [[강릉시]]) 이북에 군사 2천여 명을 선발하여, 하슬라주와 [[룡흥강|용흥강]] 일대를 지키도록 했다"고 하였다.
 
한편, [[발해]]의 [[5경제도]]에 속해 있었던 [[남경 남해부]]가 [[함경남도]] 함흥시와 [[북청군]], [[락원군]] 일대에 존재했다고 추정된다.
 
[[고려]] 때 '함주'로 불렀지만, 영토가 된 것은 단기간이었고, 원나라 [[쌍성총관부]]에 '함흥'이 속했기 때문에, 함흥시는 고려의 영토에 속하지 않고 있었으나 [[고려 공민왕]]이 [[1365년]]에 원나라가 홍건적에게 막대한 손실을 보고 있는 것을 기회로 해서 영토를 넓혔고 비로소 함흥이 고려의 영토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초기 함흥 일대는 여진족과 외적의 침입을 막는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고, [[태조]] [[이성계]]가 임금의 지위에서 물러나서, 1403년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조선시대 후기와 [[대한제국]] 시기에 함흥시는 [[함경남도]]에 소속되었고, 함경남도청 소재지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1930년]] 함흥군 함흥면이 함흥부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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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이 되면서, [[소비에트 연방]]의 관할지역으로 되어 있었다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1948년]] [[9월 9일]] 건국하고, 지방행정 개혁을 실시하면서 [[함경남도]]청 소재지가 되었다.
 
함흥시는 [[한국전쟁]] 때 공공시설과 수많은 주택이 파괴되고 막대한 손실을 입었는데, [[천리마운동]] 때 2차선도로를 구축하고 고층 아파트가 건설되면서 새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천리마운동 때 도시개발을 할 때에는 소련과 [[동독|독일민주공화국]]의 지원이 있었다. 새 시가지는 대부분 중앙유럽의 공산주의 나라의 도시들처럼 바둑판형의 계획도시로 탈바꿈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60년]]에 함흥시를 직할시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1970년]]에 다시 [[함경남도]] 도청소재지로 돌아왔다. 이때 새로 생긴 군이 [[덕산군]](옛 덕산구역), 퇴조군(옛 퇴조구역, 현 [[락원군]]) 등이다. 덕산군은 다시 [[1974년]] 함흥시 회상구역에 편입되어 폐지되었다.
 
이 도시는 [[1992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만든 예술영화인 〈[[도시처녀 시집와요 (영화)|도시처녀 시집와요]]〉의 촬영지로 유명하며, 주요 관광지는 마전유원지와 [[함흥대극장]], 그리고 경기장와 함흥본궁이 있으며 그중에서, 대극장은 [[김정일]]의 지시로 만들어져 대극장이라는 이름에 맞게 크고, 웅건하게 솟아 있다.
 
[[2001년]] 8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함흥시에서 [[흥남구역]], 해안구역, 흥덕구역과 사포구역의 일부를 떼어 흥남시로 명명하고 주요산업시설을 흥남시에 옮겼으며, 함흥시의 각 행정구역들을 폐지하였다. 그러나 [[2005년]]에 흥남시는 다시 함흥시로 돌아왔다.
 
== 구 행정구역 ==
* [[흥남구역]] (興南區域)
 
* [[동흥산구역]] (東興山區域) - [[1977년]] 이전 반룡구역(盤龍區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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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
{{주석각주}}
 
{{함경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