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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일보》'''(慶南日報)는 [[1909년]] [[10월 15일]]에 창간된 대한민국 최초의 지방신문이자 현재 발행되고 있는 대한민국 지방신문 중 그 역사가 가장 긴 신문이다. [[경상남도]]에서 발행되는 두 개의 일간 신문 가운데 하나이다.
 
== 개요 ==
=== 창간 ===
[[1909년]] [[10월 15일]]에 창간하여, 대한민국 지방신문의 모태가 되었다. [[1908년]] 울산의 대지주인 김홍조(金弘祚)를 비롯한 경남 지방의 실업인들이 진주에 모여 신문사 설립에 의견을 모으고, 이듬해 9월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이란 사설로 민족의 울분을 달랬던 [[장지연]] 선생을 주필로 하여, [[10월 15일]]에 창간하였다.
 
=== 경남일보 필화 사건 ===
당시의 발행부수는 8,000부로 한반도 전역과 중국 상하이, 일본 도쿄에까지 배포가 되었다. 창간 1주년을 앞둔 [[10월 11일]]자 사조에 매천 [[황현]]의 절명시(絶命詩)를 게재했다가 신문을 압수당하고, [[1910년]] [[10월 14일]] 첫 정간을 당하게 되어 창간 1주년 기념행사를 치르지 못한다. 결국 [[경남일보 필화 사건]] 11일 후 [[10월 25일]] 해제되어 27일부터 정상발행을 하게 되었다.
 
[[1912년]] [[8월 30일]] 일제의 탄압으로 주필 장지연이 사임하고, 2대 주필에 권도용(權道溶)이 취임하였으나 8개월 만에 물러나고 3대 주필에 강전(姜筌)이 취임하였지만, [[1915년]] 887호를 마지막으로 1월에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당하게 된다.
 
=== 재창간 ===
[[1946년]] [[3월 1일]] 경남일보는 반공, 반독재, 반부패를 기조로 삼고 재창간을 하게 된다. 당시는 좌우익의 갈등이 극에 다달았는데, [[1947년]] 10월 좌익세력이 신문사에 난입하여, 강제로 붉은 기를 게양하고 논조를 바꾸라면서 협박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결국 [[1949년]] [[3월 2일]] 경영난으로 무기 휴간했다가, 9월 1일 속간하게 된다. 이때 [[개천예술제]]의 전신인 영남예술제를 전폭적으로 후원하여 첫 행사를 진행하였다.
 
=== 자유당 독재시절 ===
[[1952년]] [[한국전쟁]] 중에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 기반을 위해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자 이것을 비난하며,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는 사설을 실었다. 이로 인해, 10일 후 밤 11시에 10여명의 무장괴한으로부터 테러를 당해 1주일간 신문을 휴간하였다.
 
자유당 정권의 압력으로 그 해 9월 문해술 사장이 주식을 사원에 무상 양도하고 퇴임했다. 이어 [[설창수]] 주필이 제6대 사장에 취임하고, 사원동인제를 채택하게 된다. 1954년 5월 31일 전쟁으로 불탄 사옥을 준공하고, 사세신장을 꾀하는 한편, [[진주성]]에 골프장을 건설하려던 계획을 끈질긴 반대논지와 시민운동으로 무산시켰다.
 
=== 박정희 군사정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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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 군사정부 ===
[[1979년]] 박정희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신군부가 정권을 탈취하면서, 경남일보는 또 다시 강제 폐간당하게 된다. [[1980년]] [[11월 13일]] 김윤양 사장은 이사회에서 폐간 사실을 밝히고, 11월 25일자 폐간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게 된다.
 
=== 복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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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석각주}}
 
{{대한민국의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