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 제2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Shirobot (토론 | 기여)
잔글 白:사:Ysjbserver요청으로 {{주석}}을 {{각주}}로 바꿈 total:18220, replaced: {{주석 → {{각주 using AWB
31번째 줄:
 
== 국명 ==
현재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는 '불가리아'이다. 차르 [[칼로얀]]의 시기 동안은 때때로 불가리아인과 왈라키아인의 국가로 불렸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와 [[라틴 제국]]의 황제 [[앙리 (라틴 제국)|앙리]]와 같은 외국인들은 공식적인 편지에서 '불가리아' 혹은 '불가리아 제국'으로 언급했다. 근대 역사가들은 이 국가를 '제 2차 불가리아 제국(Second Bulgarian Empire<ref>[http://books.google.co.kr/books?id=df2mIOnbrDoC&pg=PA45&dq=%22Second+Bulgarian+Kingdom%22&hl=en&ei=n8tkTqnqIIzJsgb0kYGrCg&sa=X&oi=book_result&ct=result&redir_esc=y#v=onepage&q=%22Second%20Bulgarian%20Kingdom%22&f=false]</ref>)' 등의 이름으로 불렀고, 그외에도 '불가리아-왈라키아 제국'<ref>[http://books.google.co.kr/books?id=r5OOAAAAMAAJ&q=%22+vlach+bulgarian+empire%22&dq=%22+vlach+bulgarian+empire%22&hl=en&ei=SeFgTvKiIMXXsgaK-sSADg&sa=X&oi=book_result&ct=result&redir_esc=y]</ref>, '루마니아-불가리아 제국'(주로 루마니아 역사가들에 의해)<ref>Romania: borderland of Europe, by Lucian Boia, p.62</ref><ref>[http://books.google.ro/books?id=xDwMAQAAMAAJ&q=%22romanian+bulgarian+empire%22&dq=%22romanian+bulgarian+empire%22&hl=ro&sa=X&ei=C32TUI3KNsXysgbbjYGwDA&redir_esc=y Ioan Aurel Pop, ''Romanians and Hungarians from the 9th to the 14th century: the genesis of the Transylvanian medieval state'']</ref> 등의 용어가 사용되었다.
 
== 역사 ==
=== 등장 ===
 
1차 불가리아 제국은 [[1018년]] [[비잔티움 제국]]의 [[바실레이오스 2세]]에게 멸망하였고, 불가리아는 비잔티움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불가리아에는 [[테마 제도]]가 실시되었고, 고위 귀족과 성직자들의 특권이 보장되었다.<ref>金原「中世のバルカン」『バルカン史』、83,85頁</ref> 하지만 바실레이오스 2세 사후 후계자들의 시대에 불가리아에는 압정이 가해졌다.<ref name="주석1"> 金原「中世のバルカン」『バルカン史』、85頁</ref> [[불가리아 정교회]]의 오흐리드 수좌주교구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구에 종속되었고,<ref>井上、栗生沢『ビザンツとスラヴ』、318頁</ref> 대주교 자리는 그리스인들이 차지하였고, 불가리아인들이 뽑히는 것은 불가능해졌다.<ref>クランプトン『ブルガリアの歴史』、34頁</ref> 또한 불가리아 귀족들과 차르의 친척들은 비잔티움 제국의 직위를 받고 아시아 지역으로 이주당했다. 하지만 불가리아인들은 비잔티움 제국에 완전히 통합되지 않았다. [[1041년]], [[1072년]], [[1080년]]에 연달아 봉기가 일어났으나 이 봉기는 모두 진압되었다.
 
[[1040년]] [[미카일 4세]]에 의해 시행된 재정 개혁으로 불가리아의 농민들에게는 금전으로 세금이 부과되었고,<ref name="주석1"/> 테마 제도가 프로노이아 제도로 변화하면서 농민들은 영주의 착취에 시달리게 되었다. 12세기 후반 [[마누엘 1세]] 사후 [[안드로니코스 1세]]를 시작으로 일련의 무능한 황제들이 등장하면서 비잔티움 제국의 발칸 지배는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1185년]] 토도르 페터르와 [[이반 아센 1세|아센]] 형제가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에 대항하는 봉기를 일으켰고, 페터르는 자신을 차르 [[페터르 4세]]로 칭하면서 [[제 1차 불가리아 제국]]의 계승자임을 선언했다. 불가리아의 해방 운동은 모에시아 지방-현재의 왈라키아 지방과 겹친다-에서 기원하여 왈라키아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도나우 강]] 건너편의 [[쿠만족]]들도 일부 참여하였다.<ref>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著, 한정숙, 김경연 譯, 비잔티움 제국사, 1999년, 325쪽.</ref>
45번째 줄:
[[1180년]] [[시칠리아 왕국]]이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해오자 불가리아에는 증세와 징병 강화가 실시되었고, [[이사키오스 2세]]의 결혼 즈음에 특별세가 부과되기까지 하였다.<ref>寺島「アセン兄弟の蜂起」『東欧を知る事典』、9頁</ref> [[1185년]] 터르노보의 귀족인 토도르 페터르와 [[이반 아센 1세|아센]] 형제가 세금의 경감과 프로노이아를 요구하였으나<ref>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著, 한정숙, 김경연 譯, 비잔티움 제국사, 1999년, 324쪽.</ref> 이사키오스 2세는 거절하였다. [[1185년]] 여름 살로니카의 성 디미터르의 [[이콘]]이 [[벨리코터르노보|터르노보]]에서 발견되었고, 아센 형제는 성 디미터르가 불가리아를 돕기 위해 살로니카를 포기했다고 선언하면서 거병하였다. 이는 불가리아 민중들에게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고,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였다. 아센과 페터르는 국가의 계승성을 강조하기 위해 제 1차 불가리아 제국의 수도였던 [[프레슬라프]]를 공격했고<ref>ディミトロフ、イスーソフ、ショポフ『ブルガリア 1』、84頁</ref>, 1185년 가을과 1186년 봄 사이에 [[바르나]]를 제외한 불가리아 북부는 해방되었다.
 
그러자 1186년 여름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이사키오스 2세]]는 직접 [[발칸 산맥]]을 넘어 모에시아를 침공했다. 아센 형제는 도나우 강 북쪽으로 후퇴했고, 이사키오스 2세는 반란이 종식되었다고 판단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다.<ref name="주석2"> ディミトロフ、イスーソフ、ショポフ『ブルガリア 1』、85頁</ref> 하지만 아센 형제는 쿠만족 용병대를 이끌고 돌아왔고 전쟁은 남부 [[트라키아]], 로도피, 마케도니아까지 확산되었다.<ref name="주석2" /> 유능한 장군이었던 아센은 많은 수의 비잔틴 군대를 신속하게 쳐부수고 끊임없이 공격했다. 1187년 로베치에서의 3달간의 포위가 실패한 뒤, 비잔티움 제국은 휴전을 요청했다. 이로써 불가리아의 독립은 사실상 승인되었으며<ref name="주석2" /><ref>森安、今井『ブルガリア 風土と歴史』、121頁</ref> 아센 형제의 막내 동생인 칼로얀이 인질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내졌다.
 
[[1189년]] [[제3차 십자군]]이 일어나자 불가리아는 비잔티움과 적대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게 40,000명의 군대를 지원하는 대신 불가리아가 차지한 영토 보전과 황제 칭호 부여를 요구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응답하지 않았고<ref name="주석3">尚樹『ビザンツ帝国史』、614頁</ref> 프리드리히 1세가 비잔티움 령을 통과한 [[1190년]] 비잔틴 군은 터르노보 원정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비잔틴 군은 천연의 요새인 터르노보를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며, 쿠만족 원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 철수하였다. 추격에 나선 불가리아군은 트랴브나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사키오스 2세는 황제의 관과 옷를 버려두고 간신히 탈출했다. 같은 해 페터르는 아센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프레슬라프를 중심으로 불가리아 북동부와 도브루자 지역을 통치했다.<ref name="주석3" />
52번째 줄:
 
=== 전성기 ===
부활한 불가리아는 흑해에서 도나우 강, 발칸 산맥과 동부 마케도니아와 모라바 계곡을 포괄하는 영토를 가졌고,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에 영향력을 미쳤다. 불가리아의 가장 성공적인 두 군주인 [[칼로얀]]과 [[이반 아센 2세]]의 시대에 불가리아는 상당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지역 강국으로 떠올랐다. [[1204년]]에서 [[1261년]]까지의 [[라틴 제국]] 시대에, 불가리아 국민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수도 터르노보에 동방 정교회의 전통을 보존한 많은 종교적 유물들을 보유한 자신들을 비잔티움 제국의 정통 후계자로 여겼다.
 
==== 칼로얀(1197~1207) ====
79번째 줄:
{{참조|이바일로의 난}}
[[File:Bulgaria-second half of the 13th century.png|thumb|right|300px|13세기 후반의 불가리아.]]
이반 아센 2세의 후계자들의 시대에 불가리아는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반 아센 2세의 후계자인 [[칼리만 아센 1세]]는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더 이상 황제권으로 지방 귀족들의 할거를 막을 수가 없었다. [[1242년]] 몽골의 침입은 불가리아를 황폐화시켰으며, 불가리아는 [[킵차크 칸국]]의 칸에게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되었다.<ref> 井上、栗生沢『ビザンツとスラヴ』、321頁</ref> [[1246년]] 칼리만 1세가 죽은 후 더 어린 [[미하일 아센 1세]]가 즉위하였고, 모후 이레네 콤네나와 왕의 장인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 등이 섭정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이 시기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와 니카이아 제국, 헝가리의 도전에 직면하였으며, 니카이아 제국은 남부 마케도니아, 로도피 산맥 지역과 트라키아의 일부를 병합하였고 헝가리는 베오그라드 지역을 병합하였다. 또한 왈라키아에서 토착 귀족들이 성장하면서 왈라키아에 대한 영향력도 상실하였다. 또한 미하일 아센 1세의 시대에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하면서 소피아에서는 왕의 사촌인 세바스토크라토르 칼로얀, 스코페의 [[콘스탄틴 티흐]]와 같은 대귀족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1256년]] 미하일 아센 1세가 죽자 귀족들은 왕위쟁탈전으로 내분에 휩싸여 1256년과 1257년 사이에 3명의 차르가 바뀌는 등 엄청난 혼란에 빠졌고, 여기에 외침까지 시달리면서 농민들은 전쟁과 약탈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권력을 장악한 새 황제 [[콘스탄틴 티흐]]는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 안정을 위해 당시 비잔틴 황제인 [[미카일 8세]]의 조카 마리아 칸타쿠제나와 결혼하였지만, 안키알로(현재의 포모리에)와 메셈브리아(현재의 [[네세버르]])를 둘러싼 다툼 끝에 다시 관계가 악화되었다. 미카일 8세는 사생아 유프로시네를 킵차크 칸국의 유력자 [[노가이 칸]]에게 시집보내면서 킵차크 칸국과 동맹을 맺었고, [[1274년]] 킵차크 칸국은 불가리아를 침공하였다. 결국 불가리아는 안키알로와 메셈브리아를 양도하여야 했다. 또한 콘스탄틴 티흐는 헝가리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패배하고 [[비딘]] 및 북서부 지역을 빼앗겼다.
 
콘스탄틴 티흐의 20년 치세 내내 불가리아는 불안정했다. 그의 치세 말년 사냥 도중 다리가 부러진 콘스탄틴 티흐는 정무를 거의 보지 못하였고, 비잔티움 제국 출신의 황후 마리아 칸타쿠제나가 실질적인 권력자로 군림하였다.<ref> ディミトロフ、イスーソフ、ショポフ『ブルガリア 1』、98頁</ref> 국가의 권위가 실추되고 중앙 권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불가리아의 무질서는 심화되었고, 군비를 조달하기 위해 민중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의 양이 늘어났다. 또한 봉건제의 발전으로 인한 영주들의 약탈과 외국의 침략은 농민들의 상황을 악화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1277년]] 도브루자의 돼지치기 [[이바일로]]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봉기를 일으켰다. 이바일로의 주도 하에 결성된 의용군은 몽골군을 격파하여 도나우 강 이북으로 몰아내었고, 이 승리를 계기로 황제에게 실망해 있던 농민들이 이바일로에게 합류하기 시작하였다.<ref>寺島「イバイロの蜂起」『東欧を知る事典』、32-33頁</ref> 같은 해 가을 이바일로는 터르노보로 진격하였고, 진군중에 민중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콘스탄틴 티흐는 의용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뒤 살해당했고, 이바일로는 터르노보를 포위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미카일 8세는 이바일로의 반란이 제국 내에 미칠 것을 염려하여 개입할 것을 결정했고, 비잔티움 제국에서 성장한 아센 가문 출신의 [[이반 아센 3세]]를 새로운 차르로 내세웠다. 이에 이바일로는 터르노보 정부와 강화를 맺고 콘스탄틴 티흐의 미망인 마리아 칸타쿠제나와 결혼하여 유럽 최초의 농민 황제로 즉위하였다.<ref>ディミトロフ、イスーソフ、ショポフ『ブルガリア 1』、99頁</ref><ref>金原「中世のバルカン」『バルカン史』、91頁</ref> 하지만 이바일로는 [[노가이 칸]]의 정예병과 싸우면서 드러스터르의 요새에 3달 간 포위당하였고, 이에 이바일로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터르노보의 귀족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마리아 칸타쿠제나를 축출하고 이반 아센 3세를 맞아들였다. 하지만 이바일로는 포위를 뚫고 다시 나타나 이반 아센 3세를 지원하는 비잔티움 군대를 두 차례나 격파하였고, 이반 아센 3세는 이에 겁에 질려 비잔티움 제국으로 달아났다. 귀족들은 쿠만족 계통의 귀족 게오르기 테르테르를 새로운 차르로 추대하면서 그를 중심으로 통합되었고, 이바일로와 게오르기 테르테르의 전쟁은 1년 가량 지속되었으나 결국 점점 전쟁에 지쳐가던 기색이 역력하던 이바일로군의 패배로 끝났다. 이바일로는 킵차크 칸국으로 망명하였으나 노가이 칸에게 암살당하였다.<ref>ディミトロフ、イスーソフ、ショポフ『ブルガリア 1』、100頁</ref>
146번째 줄:
== 경제 ==
=== 농업 ===
중세 불가리아의 경제는 농업, 광업, 전통적 수공업, 무역에 의존하는 형태로 다른 유럽 지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 2차 불가리아 제국의 산업은 농업과 축산업 중심이었고, 농경지는 이포제가 실시되었다.<ref name="주석11"> ディミトロフ、イスーソフ、ショポフ『ブルガリア 1』、115頁</ref> 제국의 가장 주요한 농업 지대는 도나우 강 평원 지대와 트라키아 지역이었고, 주로 재배되는 작물은 밀, 보리, 수수였다. 13세기부터 야채, 과수, 포도의 중요성이 증가하였다.<ref>Ангелов, Д. По въпроса за стопанския облик на българските земи през XI-XII век ИП, 1950, с.429</ref> 가장 중요한 와인 생산 지대는 흑해 연안과 스트루마 강 일대의 남마케도니아 지역이었다. 목축업 역시 발달하여 많은 양, 돼지, 소가 키워졌다.<ref>Georgius Acropolita. Historia, p.18</ref> 목초지는 계곡 일대를 겨울 목초지, 산간 지역을 여름 목초지로 구분하였다. 14세기에는 양봉과 양잠업이 발달하였다.<ref>Сакъзов, Ив. Средновековното манастирско стопанство в България- СБИД, 22, 1923/1924, с.221</ref> 숲은 벌목이 허용된 지역과 금지된 구역이 구분되었다.<ref>Ангелов, Д. По въпроса за стопанския облик на българските земи през XI-XII век ИП, 1950, с.431</ref>
 
당시 불가리아의 특산품으로는 곡물, 양봉 산물(벌꿀, 밀랍), 실크 제품, 가죽 제품 등을 들 수 있다.<ref name="주석11" /> 그 중에서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제노바, 베네치아 등에 수출된 밀의 품질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ref>森安、今井『ブルガリア 風土と歴史』、139頁</ref>
 
=== 수공업 ===
12세기에서 14세기까지 불가리아에서는 금속제련과 광업이 발달하였다. 불가리아의 대장장이들은 망치, 도끼, 톱, 베틀 등과 무기, 갑옷 등을 생산하였다. 13세기 광석 추출을 더 효율적으로 만들고 새로운 채굴 방법을 개발한 작센의 광부들이 서부 불가리아에 나타났다. 그들은 로도피 산맥 동부의 금광에 거주하였다. 중세 불가리아에는 대략 50여 개의 수공업 직종이 알려져있으며, 가죽공, 신발공, 목수, 방직공 등과 식량 가공업자(빵, 버터, 치즈, 와인)들이 알려져 있다. 또한 터르노보, 플레벤<ref>Снегаров, Ив. Неиздадени старобългаски жития- БДА, 3, 1953, 163-167</ref>, 소피아<ref name="ReferenceA">Лишев Стр. Българския средновековен град, с.9</ref> 등을 중심으로 공성 병기의 개발도 이루어졌고, 군대에는 숙련된 기술자가 배치되어 있었다.<ref>Лишев Стр. Българския средновековен град, с.9<name="ReferenceA"/ref>
 
=== 상업과 무역 ===
192번째 줄:
 
== 주석 ==
{{주석각주|2}}
 
== 참고 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