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규호: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Averrange (토론 | 기여)
Shirobot (토론 | 기여)
잔글 白:사:Ysjbserver요청으로 {{주석}}을 {{각주}}로 바꿈 total:18220, replaced: {{주석 → {{각주 using AWB
1번째 줄:
'''민규호'''(閔奎鎬, [[1836년]] [[8월 20일]] ~ [[1878년]] [[10월 15일]])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자 척신으로, [[민유중]]의 아들 [[민진원]]의 5대손이다. [[명성황후]]의 12촌 오라버니이며 [[순명효황후]]의 아버지 [[민태호 (1834년)|민태호]]의 친동생이자 8촌 동생이다.
 
철종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1859년(철종 10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다. 고종 즉위 초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정면 비판하였고 흥선대원군 실각 후 [[명성황후]]에 의해 중용되어 [[우의정]]에 이르렀다. 대원군 실각 후에는 개항 정책을 펼치며 쇄국을 지양하고 개항할 것을 내세우는 개국론(開國論)을 주장하고, 민씨 척족내에서 막후 영향력을 행사했다. 자는 경원(景園), 호는 황사(黃史), 사호(賜號)는 지당(芝堂), 시호는 충헌공(忠獻公)이다. 본관은 [[여흥 민씨|여흥]]. [[경성부]] 출생.
6번째 줄:
[[민유중]]의 아들이며 [[인현왕후]]의 오빠인 [[민진원]]의 고손 [[민치오]]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철종|철종]] 때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1859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66년 11촌 아저씨인 [[민치록]](閔致祿)의 딸이 왕비가 됨에 따라 그 일족으로 특별히 등용되어 [[이조 (행정기관)|이조]][[참의]]가 되었다. 1867년(고종 4) 다시 이조참의가 되고 이조참판으로 승진한 뒤 한성부우윤을 지냈다. [[1869년]] 형조참판이 되었다가 다시 이조참판을 지냈다. [[흥선대원군]]의 집권중 서구 문물에 대한 개국론(開國論)을 주장하며 [[쇄국 정책]]에 정면 반대하였다. [[1874년]] [[11월]]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이 친정하면서 대원군의 정책을 폐지시켜 나갔다.
 
그 뒤 예조 및 이조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의 쇄국주의에 반대하고 대외에 개국론을 전개하였다.<ref> {{서적 인용
|저자=한영우
|제목=명성황후와 대한제국
16번째 줄:
|id=ISBN 89-86361-57-4
|쪽=37쪽
}} </ref> 이후 규장각 제학을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승진, [[의정부]][[우의정]] 겸 삼군부사를 지냈다. 그는 평소 [[민치록]]의 양자가 된 [[민승호]]와 [[민겸호]] 형제를 경멸하여 멀리하였다.
 
[[고종]]은 민승호에게 충정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런데 민승호에겐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민비는 가까운 친척을 배척하고 촌수가 좀 먼 [[민태호]]의 아들 민영익을 양자로 삼겠다고 했다.<ref name="hwang40">황현, 《매천야록》 (정동호 역, 일문서적, 2011) 40페이지</ref> 그러자 [[민태호]]는 반대하였고 그의 동생 [[민규호]]가민규호가 형을 협박했다. "천의(왕후의 뜻)를 어찌 감히 어기겠소? 양자를 보내어 함께 부귀를 누리는 것도 좋지 않겠소이까?" 그래서 [[민태호]]의 아들 영익은 [[민승호]]의 양자로 들어갔고, 뒤이어 [[민규호]]는민규호는 [[이조판서]] 겸 도통사가 되었다.<ref name="hwang40"/> 그 뒤 [[1878년]] 와병 중 [[의정부]]영의정이 되었다가 다시 우의정으로 고쳐 임명되었으나, 7일만에 죽었다. 예서, 행서, 초서 등 글씨에 능하였다. 충헌(忠獻)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 가족 관계 ==
43번째 줄:
 
== 주석 ==
{{주석각주}}
 
{{토막글|한국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