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살무늬토기 시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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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토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던 시대로, [[한반도]]는 [[신석기 시대]]이며, 농업은 아직 소규모인 [[수렵]]과 [[채집]]이 중심이었던 시대이다.
 
토기의 겉면에 빗 같은 무늬새기개를 이용해 만든 기하학적인 무늬를 배합하여 각종 무늬를 그린 토기이다. 대체로 나무·뼈연장 또는 그것으로 만든 여러 가닥이 난 빗살모양의 무늬새기개를 가지고 그릇 바깥 면에 짤막한 줄이 배게 누르거나 그어서 새긴 것을 빗살무늬라고 부른다. 이러한 빗살무늬는 질그릇에 따라 여러 모습을 나타내는데, 한국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선·점선으로 된 짧은 줄을 한쪽 방향으로 또는 서로 방향을 엇바꾸어가면서 그려서 그 모습이 생선뼈처럼 생긴 것이다.
 
그릇 모양은 밑창이 달걀처럼 생긴 것과 밑이 납작하여 깊은 바리처럼 생긴 것이 대표적인데, 그릇 종류에는 독 모양이 큰 것을 비롯하여 항아리·단지·대접·보시기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가 있다.
 
바탕흙에는 진흙에 모래만 섞은 것과 석면·활석부스러기 같은 것을 섞은 것이 있으며, 그릇 색깔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갈색이 기본을 이룬다. 대체로 섭씨 600~700℃의 열을 가하여 구운 것인데, 땅을 판 구덩이에서 별다른 특별한 시설 없이 장작불을 피워 구운 것으로 생각된다.
 
토기의 용도는 그 크기에 따라 각각 달랐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현재의 독과 같이 대형은 저장용, 중형은 취사용, 소형은 식기와 음식준비 과정에 각각 사용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빗살무늬그릇은 형태와 무늬가 지역에 따라 다양한 차이를 보인다.
 
== 역사 ==
초창기,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한다.
 
=== 초창기===
초창기는 [[기원전 8000년]]에서 [[기원전 6000년]]경까지 이른다. 초기의 토기로서는 남부에서 [[덧무늬토기]](隆起紋土器, 융기문토기)가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겉면에 진흙띠를 덧대어 붙이거나 겉면을 맞집어 돋게하여 무늬를 만든 것이다.
 
덧무늬토기는 남쪽으로는 [[제주도]] 고산리 유적, [[부산]] 동삼동 유적(사적 266호, 영도구)과 영선동 유적, [[울산]] 우봉리 유적, [[거창]] 임불리 유적, [[양산]] 신암리, [[통영]] 상노대도 등과 남부 지역과 [[양양군|양양]] 오산리 유적, [[춘천]] 내평리 등 북부지방까지 남해안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도 발견되었다. <ref>{{웹 인용
|url = http://jinju.museum.go.kr/mor/mor_wes_sin03.jsp
|제목 = 신석기시대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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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기===
후기는 [[기원전 2000년]]부터 [[기원전 1500년]]경으로 추측된다. 내륙부의 거주가 증가하여 패총의 수가 줄어들고, 농업에 의존하는 생활이 진행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초기 [[민무늬 토기]]([[기원전 1500년]]~[[기원전 1250년]])의 등장과 다르지 않다. 이것은 소규모의 농경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후기 빗살무늬 토기는 [[랴오닝]]의 [[샤자디안 하층문화]]와 거의 같은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고고학자들은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암각화]]가 이 시대의 것이라고 주장을 하지만 논란이 되고 있다.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하는 후기 빗살무늬 토기 시대의 사람들은 점차 남쪽으로 이주하여 농경으로 전환된 민무늬 토기의 사람들로 바뀌어 갔다.
 
[[진주시 ]][[대평면]] [[상촌리 유적]]이나 합천댐 수몰지구에서 발견된 [[거창군]] [[임불리 유적]] 등이 이 시기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 갤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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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
{{주석각주}}
 
{{글로벌세계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