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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흥록'''(宋興祿, [[1801년]] ~ [[1863년]])은 [[조선]] 말기의 [[판소리]] 명창이다.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 비전리에서 태어났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PPL_6JOc_A9999_1_0006125|송흥록}}</ref> <ref>[http://namwon.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0601888 송흥록 - 디지털남원문화]</ref>
 
음악에 천부적인 재질을 가지고 태어나 소리는 극히 청미하며, 성량이 풍부하였고 부친이 한 두 번 선창을 하면 그대로 방창하였다. 부친 송첨지는 초대 명창 송첨지의 수행고수였다. 12세 때 백운산으로 들어가 소리공부에 전념하고 밤이면 글을 배우며 입산한 지 5년만에 소리를 터득하였다. 또한 소리를 정리하고 집대성하였으며 10년만에 득음대성하였다. 1859년(철종 10년) 봄, 의정부좌찬성 김병기의 부름을 받고 왕 앞에서 여러 차례 소리를 하였다. 이에 철종은 송흥록에게 정삼품인 통정대부의 벼슬을 제수하였다.<ref>남원시, 국가의 성지 가왕 송흥록 생가, 팜프렛, 2011년 발행</ref>
 
근세 8명창 가운데 한 사람이다. 판소리의 중시조 또는 가왕(歌王)으로 꼽히고 있다. 판소리에 우조, [[계면조]]를 체계적으로 다루었고 진양조를 도입하는 등 고도로 예술화시킨 판소리의 중시조(中始祖)라 할 수 있다.
 
[[동편제]] 유파를 확립하였으며, 그의 가문에서는 [[송광록]]·[[송우룡]]·[[송만갑]] 등 쟁쟁한 명창이 잇따라 배출되었다. 그의 매부인 명창 김성옥(金成玉)과 함께 판소리에서 처음으로 [[진양조]](판소리에서 제일 느린 가락)를 개발, 특히 세도가(勢道家)인 [[김병기 (1818년)|김병기]]의 총애를 받고 '호풍환우(呼風喚雨) 송흥록'이란 별호로 불리었다. 그의 집에서 몇 년간 기거했으나, [[1862년]]([[조선 철종|철종]] 13년) 김병기의 비위에 거슬려 함경도로 추방되었다. 후에 흥선대원군이 그를 찾았으나, 행방을 알 수 없었다.<ref name="박황">{{서적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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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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