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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 대전 후부터 헝가리 봉기까지 ===
[[파일:Imre Nagy, Budapest statue.jpg|thumb|left|[[부다페스트]]에 있는 너지 임레의 동상]]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소련군에 의해 헝가리가 점령돼 [[라코시 마티아시]]가 인솔하는 헝가리 근로자당이 실권을 잡고 있는 중, 근로자당 간부로서 농림수산부 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1953년 6월에는 라코시의 후임으로서 수상으로 취임하였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사후, 느슨해지기 시작한 헝가리의 [[공산주의]]에 대해 헝가리 민중은 저임금 문제나 식량난에 허덕이는 조직적인 파업을 결행하였다.
 
또 부다페스트 중공업, 경공업 지대에서도 파업이 잇따랐는데, 이러한 자국의 위기 상황을 중요하게 본 그는 정책 노선을 새롭게 바꾸었다. 우선은 곤궁한 국민의 생활을 개선하려는 방법으로 공산주의 상징의 하나이기도 한 농업 집단화 제도를 폐지했고, 그 밖에 종교적 관용과 강제 수용소 폐지를 실행하였다. <ref>《유럽인물열전 2》221쪽</ref> 그러나, 너기의 이같은 서방 자본주의 진영적인 방식은 곧바로 [[스탈린주의]]자들과의 대립을 불렀다. 그 결과, 1955년 4월에 실각에 몰렸고 같은 해 11월, 근로자당으로부터 제명되었다.
 
그런데, 헝가리에서 서서히 민주화, 자유화를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져 가던 중, 다시 너지를 정권에 복귀시키자는 국민들의 의견이 높아지면서 1956년 당에 복귀하였고, 같은 해 헝가리 봉기가 발발하면서 다시 수상이 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이나 반공 민족주의자들과의 연립 정권을 조직해, 일당 독재 체제의 해체와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서의 탈퇴, 그리고 헝가리 중립의 표명 등 차례 차례로 민주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소비에트 연방]]의 영향권 이탈로 간주되었고, [[소련군]]이 헝가리를 침공해 수도 부다페스트를 점령하는 긴박한 사태에 이르렀다. <ref>《빌리 브란트》123쪽</ref> 이 일로 인해 너지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대피하였다.
 
그 후에 신변 안전을 보장 받고 대사관을 나왔지만 [[소련군]]에 체포되었다. <ref>《유럽인물열전 2》222쪽</ref> 너지는 [[루마니아]]로 신병이 옮겨져 [[국가보안위원회]](KGB)에 의한 비밀 재판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시신은 부다페스트 교외의 시립 묘지에 매장되었다.
 
=== 처형 후 ===
 
==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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