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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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도'''(尹東度, [[1707년]](숙종33) ~ [[1768년]](영조44)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다. [[사도세자]]에게 호의적이었으며 당색으로는 소론 계열이었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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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4년(영조 20) 진사가 되고 이듬해 해주판관으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745년 사서·부수찬·헌납·교리를 거쳐 1748년 부교리·수찬, 1750년 장령, 1751년 부응교·도승지·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다음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그 이듬해 병으로 인하여 체개(遞改)되고 1754년 대사성·대사간·부제학·승지를 거쳐 1758년 이후 대사헌·이조참판·부제학·청풍부사·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761년에 우의정에 올라 이듬해 함경남도병마절도사 윤구연(尹九淵)의 처벌에 반대, 용서를 청하였다가 파직되고 다시 3일만에 복직되었다.
 
[[나경언]]의 벽서 사건 때(1762년), 벽서 사건의 주모자로 안성저 사람을 지목했고, 안성 사람들은 윤동도의 아들 윤광유(尹光裕)가 사주했다고 지목했다.<ref name="이덕일1">이덕일 《사도세자의 고백》(휴머니스트 2004) 73페이지</ref> 이 소식을 들은 윤동도가 사임 표하였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누명임을 알고 윤동도에게 수서를 내려 위로했다. 세자는 안성저 사람의 자백이 사전에 짜여진 각본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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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
{{주석각주}}
 
[[분류:1707년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