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포왜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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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1510년]] 중종 5년 [[4월 4일]] 제포에 거주하고 있던 항거왜추(恒居倭酋), 대조마도(大趙馬道), 노고수장(奴古守長) 등이 병선 100척<ref>[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ka_10504010_006&grp=&aid=&sid=0&pos=0 :::::조선왕조실록의 홈페이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봇이 따온 제목 -->]</ref> 과 무장한 왜인 4~5천명을 거느리고, 성을 공격하였다. 이들은 삼포의 각 관리들의 부당한 요구를 토로하며, 부산포 첨사는 소금과 기와를 굽는데 사용하는 땔감을 과하게 요구하였고, 웅천 현감은 왜인들의 상업 활동을 금하면서 급료를 제대로 주지 않고, 제포의 첨사는 고기잡이를 할 때 허락을 해주지 않으면서, 왜인 4명을 살해했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웠다. 이들은 부산포, 제포를 함락시키고, 영등포를 불사르고, 웅천진 등을 공격하였다.<ref>{{웹 인용
|url = 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ka_10504008_003&grp=&aid=&sid=14581125&pos=0
|제목 =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 김석철이 부산포·제포가 왜구에게 함락되었음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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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일자 =
|인용 =
}}</ref>
 
[[1510년]] [[4월 13일]] 확전을 염려한 대마도주 종성친은 서계를 보내 강화를 요청하였다.<ref>{{웹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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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행을 허락한 사람 중에 도서를 받은 자는 도서를 고쳐 발급한다.
 
이후 조선 관병과 대마도 왜인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으므로 [[1514년]] 중종 36년에 부산포로 왜관을 옮기고, [[1678년]] 숙종 4년에는 다시 왜관을 초량(草梁)으로 옮겼다. 왜관에는 주위에 성을 쌓고 그 안에 왜인이 거류하며 시장, 창고, 공청(公廳) 등이 있고 관수왜(館守倭, 관을 지키는 왜인) 등이 상주하였다. <ref>{{웹 인용
|url =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ka_12510002_003&grp=&aid=&sid=14590560&pos=2
|제목 = 예조가 표류한 유구국 사람을 대우하고 돌려보낸 전례에 대해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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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
{{주석각주}}
 
{{한국과 일본의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