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대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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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자유과|일반교육]]의 한 부분으로서 [[법학|법률]] 교과가 보편화되고 난 후, 그 다음 단계로 법률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등장했다. 이 시작은 [[파비아]]와 [[라벤나]]의 학교에서 이루어졌다. 파비아는 [[롬바르디아]]법으로 유명했고, 라벤나는 [[로마법]]으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 두 지역을 제치고 [[이탈리아]] 최고의 학교이자 최초의 법률대학이 탄생한 지역은 [[볼로냐]]이다. 볼로냐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중앙으로 가는 여러 도로의 접점이었으며, 수많은 교역이 일어나는 상업 중심지였다. 하지만 이러한 지역적 유리점보다 더 결정적인 사건은 이르네리우스(Irnerius)라는 대법학자가 볼로냐에 나타난 것이다.
 
[[볼로냐 대학교]]가 [[유럽]] 전역에서 [[법학]]으로 명성을 얻게 하고, 또 이 대학교의 설립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이르네리우스라는 데에는 대체적인 동의가 되어있으나, 이르네리우스 개인에 대해서는 세부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 이르네리우스가 당대의 저명한 법학자였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 이르네리우스가 수많은 학생을 끌어모은 사실로 미루어 대단히 훌륭한 교사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르네리우스에 대해 이 이상의 사실을 알아내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 심지어 그의 교육 방식과 내용에 어떤 새로운 점이 있었는지에 대해 아는 것도 어렵다<ref name="Charles M. Radding 1988">The emergent role of Pavia put forward by Charles M. Radding, The Origins of Medieval Jurisprudence: Pavia and Bologna, 850-1150(Yale University Press, 1988)., 서문 ix페이지.</ref><ref>《서양교육사》, 윌리엄 보이드 저, 이홍우 외 2인 역, 교육과학사, 2008., 180페이지.</ref>.
 
아마 법률 교육에서의 이르네리우스의 주된 공헌은 그가 교육한 과목 중 《[[로마법 대전]] 개요서》<ref>이 서적은 [[로마법 대전|유스티니아누스 법전]]에 대한 [[로마]]의 저명한 법률가들의 주석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법전과 함께 「민법대계」를 이룬다.</ref> 의 새로운 부분을 조명한 데에 있을 것이다. 이르네리우스는 단순히 법의 원칙적인 면만을 논쟁하는 대신 표준적인 법조문 자체를 정밀하게 연구한 최초의 인물로 여겨진다<ref>The emergent role of Pavia put forward by name="Charles M. Radding, The Origins of Medieval Jurisprudence: Pavia and Bologna, 850-1150(Yale University Press, 1988)., 서문 ix페이지.<"/ref>. 법률 교육에서 이르네리우스가 일으킨 혁신이 무엇이건 간에 법학의 범위가 대단히 확장되어서, 이제 법학은 자유학과에 부속된 군소교과의 지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학문영역으로 발전하였다. 이와 함께 이르네리우스와의 연관으로 인해, 볼로냐는 유럽 전역에서 최고 수준의 법학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도시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ref>《The university in medieval life, 1179-1499》, Hunt Janin저, Jefferson, NC : McFarland & Co., 2008., II장</ref>.
 
==== 유럽 북부 대학교의 기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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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냐]] 지역에서 우니베르시타스와 권력기관과의 마찰은 간단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볼로냐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외국인들이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본국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는 계급 출신이었다. 그들은 볼로냐에서 교수들과 시 당국에 대항하여 그들의 이익을 수호하고자 했고, 이러한 계기로 우니베르시타스를 조직하였다.<ref>《중세대학의 설립과 발전》, 김동구 저, 문음사, 2003., 29페이지.</ref>
 
13세기 중엽, [[볼로냐]]에 있던 여러 군소 우니베르시타스들은 치트라몬타나 우니베르시타스<ref>‘치트라몬타나(''Citaramontana'')’는 ‘산 이쪽’이라는 의미로, [[이탈리아]] 내([[롬바르디아]], [[토스카나]], [[로마]] 출신학생들로 구성된 우니베르시타스</ref> 와 울트라몬타나 우니베르시타스<ref>‘울트라몬타나(''Ultramontana'')’는 ‘산 저쪽’이라는 의미로, 이탈리아 외([[프랑스]], [[독일]], [[영국]], 기타 국가 출신 학생들로 구성된 우니베르시타스</ref> 로 통폐합되었다. 이 두 우니베르시타스는 각각 회장을 선출하였으며, 회원들은 조직과 회장에 대한 복종을 맹약하였다. 14세기 초에 이 두 개의 우니베르시타스는 하나로 통합되었고, 이후에는 대학행정기구로서 학교 운영을 총괄하였다. 문학부와 의학부 등 소수의 인원을 가진 수투디아 게네랄레는 통합 우니베르시타스에 소속되어 볼로냐 우니베르시타스의 구성원이 되었다.
 
[[볼로냐]]에서 학생의 우니베르시타스와 시 당국 간의 대립은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았다<ref>《중세대학의 설립과 발전》, 김동구 저, 문음사, 2003., 32페이지.</ref>. 시 당국에 대한 볼로냐 우니베르시타스의 자치권 청원은 대부분 받아들여졌고, 구성 학생의 행동을 통제하기 위한 '우니베르시타스 회장'[rector]의 사법권도 인정받았다. 양측 간의 불화가 발생하는 주된 원인은 학생이 연관된 사법사건에 우니베르시타스 회장이 시청ㆍ시의회와 시민들을 상대로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양측이 팽팽히 맞서면서 대립하였고, 2세기 후에 [[볼로냐 대학교]]가 쇠락할 때까지 그 대립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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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원들의 이러한 행동은 교회 간부들에게 공인된 권위에 대한 반란으로 간주되었으며, 그러한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ref name="asdfsadfasdsadfsadfsadfasdf"/>. 13세기 초반의 10여 년간, [[노트르담]] 사원장은 모든 교원에게 교회 기관에 대한 복종 서약을 강요하며 첫 포문을 열었다. 이 공격에 대항하여 [[파리]] 교원조합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노트르담 사원장이 제시하는 복종 서약이 타당한 것인지를 질의하였다. 이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복종 서약이 타당하지 아니하다고 판정했으며, [[1212년]]에는 정식 교지를 내려 노트르담 사원장은 교원과 교원조합에 복종 서약을 강요할 수 없고 노트르담 사원장은 교원조합에서 제출하는 명부의 모든 신규 교원에게 자격증을 발부해야 한다고 확정하였다<ref name="asdfsadfasdsadfsadfsadfasdf"/>.
 
그러한 [[교황]]의 조치로, [[노트르담]] 사원장의 영향력은 문학부에만 한정되게 되었다. 그러나 교황의 여러 조치들에도 불구하고, [[파리]]의 교회 기관들은 교원과 학생을 종속적인 지위에 두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ref name="nate"/> 하였으며, 교원들이 대학교 운영 정관을 임의로 정했다고 하여 대학교 전체를 파문한 바<ref name="nateion"/> 가 있다. 교원들은 계속해서 [[로마]] 교황에게 교회기관에 대항하는 청원서를 제출했고 교황의 결정은 대부분 대학교와 교원에게 유리하게 내려졌다. 결국 노트르담 사원장이 교원과 학생을 억압하기 위해 운영되던 감옥은 폐쇄되고, 대학교의 파문이 취소되었으며, 교황의 인준 없이는 대학교를 파문할 수 없게 되었다.<ref name="nateion"/>
 
그러나 [[파리 대학교]]의 번민이 위와 같은 교황의 결정으로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1229년]] 시민과 파리 대학교 학생 간의 갈등으로 [[파리]] [[대주교]]의 묵인 하에 [[프랑스]] 국왕이 군대를 동원하여 많은 파리 대학생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교원들은 이 사건 직후 강의를 중단했다. 그러나 강의 중단이 아무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자, 대학교를 자진 폐쇄하기에 이르렀다. 많은 교원들이 영국의 [[옥스퍼드]] 지역으로 이주<ref>이를 계기로 [[옥스퍼드 대학교]]가 발전하게 된 것이다.</ref><ref>《옥스퍼드 & 케임브리지》, 페터 자거 저, 박규호 역, 갑인공방, 2006., 15-17, 47페이지.</ref> 하였고 일부는 프랑스 내의 신생 대학교로 흩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교원의 입장에서 [[파리 대학교]]와 [[파리]] 교회 당국 간의 중재를 시도했고, [[1231년]] 「학문의 모체(Parens Scientiarum)」라는 교지를 발표했다. 이 교지에 의하여 교원들은 강의 거부를 통해 그들의 입장을 관철할 수 있는 정식 권한을 갖게 되었고, 교원들이 파리 대학교의 규정을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고, 그 규정의 준수를 구성원들에게 강제할 수 있는 완전한 권리를 갖게 되었다<ref name="nateion"/>. 이와 동시에 [[노트르담]] 사원장의 사법권은 더욱 약화되었다. 노트르담 사원장의 형법에 대한 권한은 완전히 소멸되었고, 민법 또는 종교적인 문제에 대한 사법권도 상당히 축소되었다<ref name="nate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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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전반에 걸쳐 계속된 투쟁은 [[파리 대학교]]의 조직과 체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13세기 초만 하더라도 파리 대학교는 학부 별로 엉성하게 엮인 교원과 학생의 조합에 불과했고, 이 학부들은 [[노트르담]] 사원장의 교원 자격증으로 엮여있었을 뿐 이었다<ref name="nate"/>. 반면, 13세기 말엽에는 개별 학부들이 참여하는 협의체가 있었고, 문학부의 학장이 대학교의 총장을 겸하고 있었다<ref name="nate"/>.
 
[[노트르담]] 사원장에 공동으로 대항하는 과정에서 여러 개의 교원 우니베르시타스들이 하나로 통폐합<ref name="커리">「중세 파리대학의 학제연구」, 지영실 저, 숙명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10.</ref> 되었고, 그 중에서도 학사 과정 교육을 담당하는 문학부 우니베르시타스가 두각을 나타냈다. 이와 같이 문학부가 대두된 데에는 문학부 교원 대부분이 젊었고, 이 때문에 노트르담 사원장에게 가장 많은 괴롭힘을 받았으며, 결과적으로 문학부 교원이 가장 강한 결속으로 가장 강한 저항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문학부 교원들은 [[볼로냐 대학교]] [[법학]]도들의 선례를 따라, 국가별로 4개의 조직<ref>[[프랑스]], [[노르망디]], 피카르([[네덜란드]]), [[영국]](영국을 비롯한 북부 유럽 전 국가)</ref> 으로 규합되었다. 이 네 국가 우니베르시타스의 간부와 문학부 학장이 문학부의 투쟁정책을 결정하였다<ref>《서양교육사》, 윌리엄 보이드 저, 이홍우 외 2인 역, 교육과학사, 2008., 195페이지.</ref>.
 
[[파리 대학교]]와 [[노트르담]] 사원장 간의 갈등이 첨예화됨에 따라 문학부 교원들의 영향력이 꾸준히 증가하였고, 문학부 학장과 그 산하의 4개 우니베르시타스가 파리 대학교 특권 수호의 선봉장이 되었다. 문학부 문인들[artists; 문학부 소속 교원을 의미]이 전체 교원 중 다수를 차지했고, 빈번한 소송과 투쟁에 소요되는 비용 대부분을 문학부에서 부담한 사실은 문학부의 전체적 위상을 높여주었다. 결과적으로 문학부 우니베르시타스의 간부는 모든 학부의 협의체에서 우위를 차지했고, 문학부의 학장은 정관 상으로는 타 학부 학장과 동등한 지위에 있었으나, 파리 대학교 전체를 구성하는 7개의 우니베르시타스<ref>4개의 문학부 우니베르시타스, [[법학]] 우니베르시타스, [[의학]] 우니베르시타스, [[신학]] 우니베르시타스</ref> 을 관장하는 총장을 겸하였다.<ref name="커리nate"/><ref name="nate커리"/>
 
== 교과 조직 및 학위ㆍ학직의 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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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남유럽|이남]]의 경우도 파리 [[북유럽|이북]]의 방식과 대동소이했지만, 13세기 초반까지는 교회 기관의 허가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북쪽의 경우와 달랐다. 남부에서 교회 기관의 승인이 교원 자격의 필수요건으로 된 것은 [[1219년]] [[교황 호노리오 3세]]가 [[볼로냐]]에서도 파리와 마찬가지로 교원 후보자들이 볼로냐 부주교의 인가를 받도록 한 이후이다.
 
그런데 시일이 지날수록 교원 지위의 명예가 점점 높아져서, 교원에 실제로 종사할 의향이 없는 사람들 중에서도 교원의 지위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의 결과로 ‘가르치는 교사’<ref>[[북유럽|파리 이북]] : magistri regentes, [[남유럽|파리 이남]] : magistri legentes</ref> 와 ‘가르치지 아니하는 교사’<ref>[[북유럽|파리 이북]] : magistri non-regentes, [[남유럽|파리 이남]] : magistri non-legentes</ref> 간의 구분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스터(master)<ref>원래 교원을 의미하는 단어이다.</ref> 는 특별한 교육 과정을 성공적으로 이수한 자를 의미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마스터의 자격 요건을 더욱 엄밀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 볼로냐 대학교의 교과 조직 및 학위ㆍ학직의 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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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말에는 과정 이수 단계에 해당 교과에 대한 시험이 추가되게 되었다. [[학사]] 학위 지망자는 먼저 [[문법]] 교원과 [[논리학]] 교원과의 논변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고, [[파리 대학교]] 당국이 지정한 여러 명의 시험과 앞에서 다양한 주제에 대한 구두시험을 봤다. 이 구두시험에서 시험관은, 지원자가 적절한 기간 동안 지정된 강의를 수강했는지, 공부한 내용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 ‘판정’한다. 이 판정을 통과하면, ‘결정’과정에 들어서게 된다. 결정 과정에서 지원자는 한 주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그것을 반박하는 시험관에 대항해 자신의 입장을 변호한다. 이러한 결정 과정은 수일간 계속되고, 이를 성공적으로 마친다면 학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학사]] 학위자는 계속해서 후속 강좌를 수강하고, 그 교과 내용에 대한 강의와 논변을 행한 후, [[노트르담]] 사원장에게 교원자격증<ref>이것이 이후 석사 학위가 되게 된다.</ref> 을 신청한다. 이 때 신청자는 노트르담 사원장과 4인의 시험관 앞에서 강의 시연을 하고, 강의 주제와 관련하여 사원장과 시험관들과 논변을 펼쳤다. 신청자는 그러한 형태의 시험을 통과한 후, 입회식에 참여하는데, 자신이 속한 우니베르시타스(조합)에 특정한 선서를 하고, 기존 교원들과 형식적인 논변을 한다. 이러한 입회식이 끝나면 교원 자격증과 예모를 받고, 교원의 의자에 앉을 자격을 획득했다.
 
문학부 위의 세 개의 상위학부에서의 [[박사]] 학위 수여 절차도 문학부의 학위 수여 절차와 비슷했다. [[신학]]부, [[법학]]부, [[의학]]부의 학위 지망자는 우선 문학부의 공부를 얼마간 한 후<ref>문학부를 반드시 졸업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아니한다.</ref>, 일정 기간동안 지정된 공부를 하고, 논변 위주의 시험을 거친 뒤에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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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의 경우에는 오늘날의 대학교에서 보는 것과 같은 비종교적인 기숙시설이 아닌, 대학교회(collegiate church) 형태의 기숙사가 있었다. 옥스퍼드의 대학교회와 종전에 존재하던 형태인 연합교회(collegiate church) 간의 차이는 ‘교단과 학교를 위하여 설립된 것이 아니라 학교와 교단을 위하여(''ad orandum et studendum ad studendum et orandum'')’ 설립되었다는 점이다. 옥스퍼드에 새로인 출현한 기숙사는, 수도회들이 그 교단에 속하는 수도사들이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종사할 수 있도록 대학교 인근에 지어준 집이었다. 대학교의 기숙사에 거주하는 교원과 학생들은 하급생들에 대한 교육적 지도와 함께 대학교의 정식교원들이 하는 정규 강의에 대한 보강 수업을 필수적인 의무로 담당하였다.
 
초기 형태의 기숙사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1264년]] [[잉글랜드]]의 사원장 머튼의 월터(Walter de Merton)가 설립한 머튼 칼리지(Merton College)<ref>옥스퍼드 대학교 내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칼리지</ref> 이다. 월터는 ‘옥스퍼드와 그 인근 지역에 있는 대학교에 소속 되어있는 20여명의 학자와 두세 명의 성직자의 생계를 위하여’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장원 2개를 [[옥스퍼드 대학교]]에 기증하였다. [[1274년]]에는 월터가 자신의 장원 전체를 기증하고, 대학교 내에 성 요한 부설교회를 설립했다. 이렇게 대학교의 재산이 늘어가자, 여러 명의 학생과 학자들이 계속 유입되었다. 월터는 자신이 설립한 칼리지의 운영규정을 정했는데, 그 규정은 후대의 모든 칼리지들에서 사용하는 고전적 규범이 되었다. 당시의 머튼 칼리지의 운영규정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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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리지에서 수업을 하는 방식은 [[옥스퍼드]] 전체로 확산되었다. 15세기 말경에는 [[옥스퍼드 대학교|옥스퍼드 우니베르시타스]]에 소속되어 있던 17개의 칼리지<ref>이중 10개는 비종교적 칼리지였다.</ref> 에서 이루어지는 강좌가 우니베르시타스의 강좌를 대치하게 되었다. 옥스퍼드 대학생들은 우니베르시타스에 출석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으며, 옥스퍼드 대학교[우니베르시타스] 소속 교원들도 반드시 우니베르시타스 강좌의 강의를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1518년]] 옥스퍼드 교수단이 ‘학생들이 아무도 출석하지 않는 강의를 꼬박 한 시간씩 강제로 할 의무를 삭제해 주도록’ 요청한 사실로 보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학교의 규모가 [[옥스퍼드 대학교]]에 비해 훨씬 컷던 [[파리 대학교]]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나 옥스퍼드 대학교에 거주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학사나 교원[석사]인 것에 비해, 파리 대학교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주로 학사 과정에 있는 학생(무학위자)이었다. 때문에, 파리 대학교에서는 우니베르시타스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와 달리, 칼리지에 대해 강력한 행정력을 행사하였고, 칼리지의 발전이 파리 대학교 전체의 발전을 이끌었다. 즉, 칼리지가 우니베르시타스의 강의를 제공하는 기관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결과 중세 말기 파리 대학교의 칼리지는 기숙사로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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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해 및 인용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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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