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상드르 페티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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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스페인의 생도맹그 침공(1798년 - 1799년)에 따라 [[물라토|뮐라토]] [[앙드레 리고]], [[장 피에르 부아예]] 등과 연계해서 [[1799년]] 6월 이른바 '단도 전쟁'에서 [[투생 루베르튀르]]에 맞섰다가 패배했다. 그러나 뮐라토군은 12월 세력을 회복하고, 남부 [[자크멜]](Jacmel)을 방어했는데 수비대 사령관은 페시옹이 맡았다. 하지만 결국 [[1800년]] 3월 자크멜은 함락되었고 페시옹과 뮐라토 지도자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페시옹은 리고 등과 함께 [[1802년]] [[샤를 르클레르]]가 이끄는 1만 2000명의 정예 프랑스 원정군과 생도맹그로 돌아왔다. 투생을 반역자로 처리한 후 페시옹은 아르카에(Arcahaie)에서 비밀 회의에 참가, [[1802년]] 10월 독립군에 참가하여 한때 자크멜에서 같이 싸운 [[장자크 드살린]]을 지원했다.
 
수도 [[포르토프랭스]]는 [[1803년]] [[10월 17일]] 확보되고, [[1804년]] [[1월 1일]] 독립이 선언되어 장자크 드살린이 종신 총독이 되어, [[1804년]] [[10월 6일]]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 혁명 이후 ==
[[1806년]] [[10월 17일]] 드살린이 암살된 후 페시옹은 "공화제 옹호자"로서 [[앙리 크리스토프]]와 충돌했다. 크리스토프는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잘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나라는 남북으로 갈라져 흑인과 뮐라토 사이에 긴장이 높아졌다.
 
북부는 크리스토프가 왕위에 즉위하여 [[아이티 왕국]]이 되었다. 페시옹은 남부 '아이티'의 대통령으로 스스로 선언하고 취임 초기에는 [[민주주의]]를 지지했지만 [[의회]]의 제약을 귀찮게 여겨 [[1818년]]에 의회를 해산시켜버리고 말았으며 이미 그 이전인 [[1816년]] 페시옹은 종신 대통령이 되었다.
 
페시옹은 상업적인 플랜테이션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지지자와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했다. 그리고, '친절한 아빠({{llang|ht|Papa Bon-Kè}}, {{llang|fr|Papa Bon-Cœur}})'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토지 분배는 국가 경제에 심각한 타격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급 농업 이상을 하지 않았다. 페시옹은 포르토프랭스에 [[리세]] 페시옹(Lycée Pétion)을 개교하고 [[1815년]]에는 [[시몬 볼리바르]]를 비호하여 물질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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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
{{주석각주}}
{{Authority contr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