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티액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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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1763년]] 5월, 영국군 [[제프리 애머스트]]가 펼쳐온 [[인종 청소]] 정책에 위기감을 느낀 인디언들이 영국군의 여러 요새와 정착지를 기습하여 ‘폰티액 전쟁’을 시작했다. 인디언들은 백인들의 8개 요새를 파괴했고, 수백명의 정착민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으며, 많은 백인들이 이 지역에서 대피를 하였다.
 
오대호 지역에서 영국군과 백인 정착민을 몰아내기 위해 많은 부족 인디언 전사가 봉기했다. [[1764년]], 영국군의 원정이 시작되었고, 이후 2년간 평화 협상이 진행되면서, 적대 행위의 수준은 떨어졌다. 인디언들은 영국인을 쫓아낼 수 없었지만, 이 봉기로 영국 정부의 점령지 정책에 수정을 가져오게 되었다.
 
인디언 전쟁이 가열되자, 포로를 살해하거나 민간인을 공격하는 등, 그 밖에도 민간인 잔학 행위가 양측에서 있었다. 오늘날 알려진 사건으로는 피트 요새 영국군 장교가 [[천연두]]균에 오염된 담요를 선물하고 주변의 인디언에게 감염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분쟁의 잔인함은 영국인 정착민과 인디언 사이에 더해졌으며, 민족간 갈등이 표출되었다. 영국 정부에서는 〈[[1763년 선언]]〉을 발표하여 이주민과 인디언의 땅 사이의 경계를 명확히 설정함으로써 더 이상 민족 간의 대립이 심화되는 것을 막았다.
 
== 명칭 ==
‘폰티액 전쟁’이라는 용어는 많은 부족을 통합하여, 협상의 전면에 섰던 오타와 족의 [[폰티액 추장]]을 따서 이름지어졌다.<ref>Dixon, ''Never Come to Peace'', 303n21; Peckham, ''Pontiac and the Indian Uprising'', 107n.</ref> 이외에도, ‘'''폰티액의 반란'''’, ‘'''폰티액의 봉기'''’ 등 다양하게 불린다.<ref>Nester, ''"Haughty Conquerors"'', x.</ref> 당초 전쟁의 이름은 “키야스타와 폰티액의 전쟁”이었다. 키야스타는 구야스타의 다른 읽기법이며 영향력 있는 [[세네카족]], [[밍고 족]]의 추장이었다. [[1851년]] [[프랜시스 파크맨]]이 《폰티액의 음모》(''The Conspiracy of Pontiac'')를 출판한 후, “음모”라는 명칭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파크맨의 영향력 있는 책은 1세기 가까운 사이의 전쟁에 대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증언이 되어, 지금도 출판되고 있다.<ref>McConnell, "Introduction", xiii; Dowd, ''War under Heaven'', 7.</ref>
 
파크맨을 시작으로 백인들은 인디언의 “추장 (치프)”을 “부족장” 또는 “지도자”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디언 부족은 합의제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몇몇 개인이 부족을 정리하거나 주도하는 “수장” 같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인디언 추장은 “중재자”, “촉구자” 또는 “봉사자”일 뿐이었으며<ref>『Readings in Jurisprudence and Legal Philosophy』([[w:Felix S. Cohen|Felix S. Cohen]]、1952年)</ref>, 폰티액과 구야스타가 전쟁을 이끈 것은 아니었다. 추장은 중재자로서, 백인과의 협상 전면에 서야 했다. 백인은 이것을 보고, 폰티액과 구야스타가 전쟁을 이끌고, 음모를 세우고, 선동했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전쟁 명칭을 붙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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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여 부족 ===
폰티악 전쟁에 참여한 부족은 〈[[1763년 파리 조약]]〉까지 프랑스가 소유권을 주장했던 ‘위의 나라’(''pays d' en haut'')로 [[뉴프랑스]]가 애매하게 정의한 지역의 거주 부족이었다. ‘위의 나라’ 인디언들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때, 이 지역에서 “부족”이란 정치적 의미보다 언어의 차이라든가, 혈연관계로 나뉘어 있었다. 전 부족의 말을 할 수 있는 추장은 없었으며, 더불어 그런 일에 종사하는 부족도 없었다. 예를 들어, [[오타와족]]이 한 부족으로 전쟁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오타와 족의 일부 집단이 그렇게 선택한 것이며, 다른 집단은 전쟁을 반대하며 전쟁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인디언 사회는 합의를 존중하는 민주주의 사회체제였으며,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 집단에게 전쟁파가 자신들의 의사를 강요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ref>For tribes not political units, see White, ''Middle Ground'', xiv. For other Ottawas denounce war, see White, ''Middle Ground'', 287.</ref>
 
‘위의 나라’ 부족은 기본적으로 3개의 집단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첫 번째 집단은 오대호 지역의 부족이며, [[오타와족]], [[오지브와족]], [[포타와토미족]]과 [[휴런족]]이었다. 이들 부족은 프랑스 이민자들과 오랜 동맹을 맺고 있었으며, 함께 생활하고, 교역하고 심지어는 혼인을 하기도 했다. 오대호의 인디언 부족은 프랑스가 북미를 상실한 후, 영국의 지배 하에 들어가는 것을 알고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영국군이 [[1760년]]에 프랑스로부터 디트로이트 요새를 탈취했을 때, 그 지역의 인디언은 영국군에 대해 “이 나라는 정령이 인디언에게 준 땅”이라고 경고했다.<ref>White, ''Middle Ground'', 260.</ref>
 
두 번째 집단은 동부 [[일리노이 카운티]] 지역의 부족이며, [[마이애미족]], [[웨어족]], [[키카푸족]], [[마스쿠텐족]] 및 [[피안카쇼족]]이었다. 오대호 지역의 부족과 마찬가지로 이 지역의 부족도 프랑스와 긴밀한 교류를 해왔던 긴 역사가 있었다. 전쟁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전력을 행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쟁 중에 영국군이 일리노이로 진출할 여지는 없었다. 그리하여 일리노이는 영국인들과 접할 기회가 없었다. <ref>Anderson, ''Crucible of War'', 626–32.</ref>
 
세 번째 집단은 [[오하이오 카운티]]의 집단이며, [[델라웨어족]], [[쇼니족]], [[와이언도트족]]과 [[밍고족]]이었다. 이 부족들은 세기 이전에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로쿼이족]]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하이오 강]] 계곡에 흘러들어 왔다.<ref>McConnell, ''Country Between'', ch. 1.</ref> 오대호 지역과 일리노이 주 부족과 달리 오하이오 지역의 토착 부족은 프랑스 지배와 강한 접점이 없었고, 전쟁에서 프랑스 군과 함께 싸운 이유도 영국군을 몰아내기 위해 수단이었을 뿐이었다.<ref>White, ''Middle Ground'', 240–45.</ref> 오하이오 부족은 영국군이 오하이오 영토에서 철수한다는 별도의 평화안을 맺고서 영국군과 휴전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물러나면서, 영국군은 이 지역의 요새를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했기 때문에, 오하이오의 부족은 영국군을 몰아내기 위해 1763년 전쟁에 다시 참가하게 되었다. <ref>White, ''Middle Ground'', 248–55.</ref>
 
‘위의 나라’ 외부에서는 영향력 있는 [[이로쿼이 연맹]]이 영국군과 ‘맹약의 사슬’로 알려진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폰티액 전쟁]]에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서단의 이로쿼이 족인 [[세네카족]]이 동맹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미 [[1761년]]에 [[세네카족]]은 [[오대호]]와 오하이오 영토 부족에 전령을 보내, 영국군을 몰아내기 위해 연합을 할 것을 호소했다. [[1763년]] ‘폰티악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많은 세네카족이 빠르게 행동하여 전쟁에 참가를 했다.<ref>Dixon, ''Never Come to Peace'', 85–89.</ref>
 
=== 애머스트의 정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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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북미 총사령관 애머스트 장군은 토착 인디언에 관리 정책에 대한 전반적인 책임을 지고 있었으며, 그것에는 군사적 업무와 [[모피 무역]] 규제와도 관련이 있었다. 애머스트는 프랑스가 무대에서 사라지면 인디언은 영국의 지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애머스트는 또한 인디언이 영국군에 대해서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북미에서 그의 휘하에 8,000명 중 불과 500명 정도를 전쟁이 끝난 이 지역에 주둔시켰다. 애머스트와 디트로이트 요새의 지휘관 헨리 글래드윈 소령 같은 장교들은 인디언에 대한 경멸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봉기에 참가한 인디언 부족은 “글래드윈이 우리를 노예나 개처럼 다룬다”고 자주 불평을 했다.
 
[[1761년]] 2월에 애머스트가 인디언에게 준 선물을 삭감하는 결정을 내렸을 때 토착민들은 다시 한번 분노하게 된다. ‘선물을 주는 것’은 프랑스와 “위의 나라” 인디언 부족 사이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인디언의 관습에서 선물을 주는 것은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프랑스는 부족의 추장에게 총이나 칼, 담배, 의류 등의 선물을 했고, 추장들은 그 선물을 부족 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추장은 부족에서 권위를 유지하고 프랑스와의 동맹을 유지했다. 그러나 애머스트는 프랑스와의 전쟁 이후 예산을 절감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을 불필요한 일종의 뇌물로 보았다. 많은 인디언 부족들이 이러한 정책 변화를 모욕으로 받아들였으며, 영국이 자신들과의 관계를 동맹이 아니라 정복민으로 여긴다고 생각했다.<ref>White, ''Middle Ground'', 256–58; McConnell, ''A Country Between'', 163–64; Dowd, ''War under Heaven'', 70–75.</ref>
 
애머스트는 또한 인디언들에게 판매하는 탄약이나 [[화약]]의 양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항상 이러한 물자를 사용할 수 있게 했지만, 애머스트는 동맹자였던 체로키족의 1761년의 반란 이후 인디언들을 믿지 않았다. 체로키족의 반란은 화약 부족으로 실패했기 때문에, 애머스트는 화약을 분배하는 양을 억제하면 미래의 도전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인디언 남자들은 가족을 위해 식량을 확보해야 했으며, 모피 무역을 위해 탄약은 필수품이었고, 이러한 제한 정책은 그들에게 공분과 곤궁을 가져왔다. 그들은 영국군이 인디언들에게 전쟁을 준비하지 못하도록 무장을 해제시키는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인디언 담당 부서의 감찰관이었던 윌리엄 존슨 경은 애머스트에게 선물이나 화약을 제한하는 정책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를 했지만, 헛수고로 끝났다.<ref>For effect of the Cherokee gunpowder shortage on Amherst, see Anderson, ''Crucible of War'', 468–71; Dixon, ''Never Come to Peace'', 78. For Native resentment of gunpowder restrictions, see Dowd, ''War under Heaven'', 76–77; Dixon, ''Never Come to Peace'', 83.</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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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티액 전쟁이 시작된 것은 [[1763년]]이지만, 영국 당국이 인디언이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문을 접한 것은 [[1761년]]이었다. 오하이오 영토 [[세네카족]]과 [[밍고족]]이 연합하여 영국군을 몰아내자는 통문, [[왐펌]](조개 구슬 비즈로 쓰여진 전언)으로 만든 “전대”를 안내장으로 각 지파에 돌렸다. 그야스타와 타하이아드리스가 있었던 밍고족은 자신들의 땅이 영국군의 요새에 둘러싸여 있는 사태를 우려하고 있었다. 동일한 왐펌 “전대”가 디트로이트와 일리노이 주에서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인디언들의 결속은 진행되지 않았고, [[1761년]] 6월에는 디트로이트의 인디언이 세네카족 계획을 영국군의 지휘관에게 누설했다. [[1761년]] 9월 윌리엄 존슨가 디트로이트의 많은 부족과의 협의를 한 후에 위태한 평화가 계속 유지되고 있었지만, “전대”는 계속 돌려졌다. [[1763년]] 초, “위의 나라”(''pays d'en haut'')가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할양된 것을 알게 된 인디언은 마침내 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폰티액의 주도로 오타와족의 디트로이트 요새 공격으로 시작된 싸움은 급속히 지역 전체로 퍼졌다. 영국군의 요새 중 8개가 점령되었고, 이외에도 디트로이트 요새, 피트 요새가 포위되었지만, 이들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프랜시스 파크맨은 “폰티액의 음모”(''The Conspiracy of Pontiac'')에서 이러한 공격이 폰티액의 전략적 협동 행위라고 설명하고 있다<ref>Parkman, ''Conspiracy'', 1:186–87; McConnell, ''A Country Between'', 182.</ref>. 파크맨의 해석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공격이 전체 계획의 일부인지 또는 전체가 ‘음모’인지는 뚜렷한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도 있다.<ref>Peckham, ''Indian Uprising'', 108–10. Historian Wilbur Jacobs supported Parkman's thesis that Pontiac planned the war in advance, but objected to the use of the word "conspiracy" because it suggested that the Native grievances were unjustified; Jacobs, "Pontiac's War", 83–90.</ref>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관점은 사전에 계획되었다기 보다는 폰티액 등이 디트로이트 요새에서 일으킨 봉기의 소식이 “위의 나라”에 전해져 이미 불만을 품고 있던 인디언 부족이 봉기에 참여할 동기부여가 되었다는 것이다. <ref name="ReferenceA">McConnell, ''A Country Between'', 182.</ref> 영국군 요새에 대한 공격은 동시다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오하이오 영토 인디언 부족은 폰티액이 디트로이트 요새를 포위한 후 1개월이 지나서 전투에 참여를 했다.<ref>McConnell, ''A Country Between'', 182.<name="ReferenceA"/ref>
 
파크맨은 폰티액 전쟁이 영국군을 괴롭힐 의도로 프랑스 정착민에 의해 비밀리에 선동되고 있었다고 믿었다. 이러한 견해는 당시 영국 당국에 의해 널리 지지를 받았지만, 이후 사학자들은 이 봉기에 프랑스인이 관여되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프랑스가 선동했다는 소문은 [[7년 전쟁]]에서 프랑스 전선이 원주민 마을에 까지 뻗쳤기 때문이었다.) 현대의 사학자들은 프랑스가 원주민들을 부추겼다기보다는, 오히려 인디언들이 프랑스인들을 부추겼다는 지적하기도 한다. 폰티액과 다른 인디언 지도자들은 종종 프랑스의 지배 부활과 프랑스-인디언 동맹의 재현에 대해서 언급을 했다. 폰티액은 자신의 마을에 프랑스 국기를 게양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행동은 모두 프랑스를 대영국 투쟁에 동참하도록 자극했던 의도된 행동이었다. 일부 프랑스 정착민들과 무역상들이 봉기를 지지했지만, 전쟁은 분명 인디언들이 시작했고, 그들에 의해 치뤄졌다.<ref>Dowd, ''War under Heaven'', 105–13, 160 (for French flag), 268; White, ''Middle Ground'', 276–77; Calloway, ''Scratch of a Pen'', 126. Peckham, like Parkman, argued that the Native Americans took up arms due to the "whispered assurances of the French" (p. 105), although both admitted that the evidence was sketchy.</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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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트로이트 요새 포위전 ===
[[1763년]] [[4월 27일]], 폰티액은 디트로이트의 마을에서 약 16km16&nbsp;km 떨어진 곳에서 부족간 협의회를 열었다.(인디언 사회는 합의제이다). 폰티액은 네오린에 배운 청중 설득법에 따라 오타와족, 오지브와족, 포타와토미족, 휴런족에게 여러 디트로이트 요새 점령 계획에 참여해 줄 것을 호소했다. [[5월 1일]], 폰티액은 50명의 오타와 족 전사를 이끌고 요새 수비대를 정찰하기 위해 요새로 향했다.<ref>Dixon, ''Never Come to Peace'', 108; Peckham, ''Indian Uprising'', 116.</ref> 프랑스 연대기 저자에 따르면 폰티액은 두 차례 부족 간 협의를 통해 다음과 같이 요청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인용문|우리를 그리고 형제들을 위해 우리는 파괴만 일삼는 무리들을 이 땅에서 몰아낼 겁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 형제들, 프랑스인들이 해왔던 것과 같이 자급자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영국인 모두를 파괴하는데 더 이상 주저하지 않을 것임을 맹세해야 합니다.<ref>Peckham, ''Indian Uprising'', 119–20; Dixon, ''Never Come to Peace'', 109.</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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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노이 주에서는 웨어족, 키카푸족 및 매스쿠텐족이 [[위아테논 요새]](오늘날 인디애나 주, 라파예트)가 [[1763년]] [[6월 1일]] 점령되었다. 그들은 병사들을 회의를 한다고 밖으로 유인하고, 20명의 포로들의 유혈사태 없이 포로로 잡았다. 위아테논 요새 근처의 인디언 부족은 영국군 수비대와 좋은 관계에 있었지만, 디트로이트 폰티액 추장에게서 파견된 사신들은 그들에게 공격을 종용했다. 전사들은 요새의 지휘관에게 “다른 부족들이 이렇게 하도록 강제했다”고 말을 했다. 다른 요새와는 달리 위아테논 요새에서 포로들의 인명살상은 없었다.
다섯 번째로 함락된 요새인 [[미칠리마키낙 요새]](오늘날의 미시간 주, 마키나우 시)는 기습으로 점령한 최대 규모의 요새였다. [[6월 2일]], 오지브와족이 방문한 소크족과 함께 스틱 볼(라크로스의 전신)의 경기를 하고 있었다. 이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경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스틱에 맞은 볼이 열려진 요새 문으로 들어가자 무리들이 함께 들어갔고, 그곳에서 인디언 여자들이 몰래 반입한 무기를 건네받았다. 급습을 통해 인디언들은 35명의 수비병 중 약 15명을 전투에서 죽이고, 그 밖에도 더섯 명을 더 고문하여 죽였다.
 
6월 중순에는 두 차례 공격으로 오하이오에 있던 세 개의 요새가 점령되었다. [[6월 16일]] 무렵에 이뤄코이족, 세네카족이 [[베난고 요새]](오늘날 펜실베니아, 프랭클린 부근)를 점령했다. 그들은 세네카족의 불만을 기록할 지휘관을 제외하고 12명의 수비병 전원을 즉시 죽었다. 그후 지휘관도 세네카족의 의식에 따라 화형에 처했다. 오늘날 펜실베니아주, 워터 포드에 있던 [[르뵈프 요새]]는 [[6월 18일]] 세네카족에 의해 기습을 받았지만, 12명의 수비병의 대부분이 핏 요새로 탈출할 수 있었다.
 
여덟 번째이자 최후로 함락된 요새는 [[프레스퀴 아일 요새]](오늘의 펜실베니아 주, 이리)로 약 250명의 오타와족, 오지브와족, 와이언도트족 및 세네카족에 의해 [[6월 19일]] 밤, 포위를 당했다. 이틀 동안 버텼지만 60명의 수비대 중 약 30명이 핏 요새로 반환되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그러나 인디언들은 그들 대부분이 요새로 나오자마자 살해했다.<ref name="ReferenceB">Dixon, ''Never Come to Peace'', 152–55; McConnell, ''A Country Between'', 195–96; Dowd, ''War under Heaven'', 190.</ref>
 
=== 피트 요새 포위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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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를 한 부켓 대령은 [[7월 13일]] 애머스트에게 회신을 썼다. “여러 장의 담요에 천연두균을 오염시켜 그 개자식들의 손에 들어가게 하겠습니다. 물론 나는 감염 안 당하도록 조심해야겠죠.” 애머스트는 [[7월 16일]] 호의적으로 회신했다. “담요로 인디언들을 감염시키면 충분히 잘될 것이야. 이 지긋지긋한 놈들을 근절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ref>Anderson, ''Crucible of War'', 809n; Grenier, ''First Way of War'', 144; Nester, ''Haughty Conquerors"'', 114–15.</ref>
 
애머스트와 부켓이 논의 중인 방법을 피트 요새에 포위된 사관들은 이미 자발적인 의지로 시도하고 있었다. [[6월 24일]] 핏 요새에서 평화 협상을 하는 동안 에큐이어는 포위하고 있던 델라웨어 족의 대표에게 천연두균에 노출된 두 장의 담요와 한 장의 손수건을 보냈다. 그들은 인디언들이 천연두에 걸려서 포위망을 해제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ref>Anderson, ''Crucible of War'', 541–42; Jennings, ''Empire of Fortune'', 447n26. This was not the first time that a crude form of [[biological warfare]] had been attempted in the region: in 1761, Native Americans had attempted to poison the well at [[Fort Ligonier]] using an animal carcass; Dixon, ''Never Come to Peace'', 153.</ref> 민병대 지휘관이었던 윌리엄 트렌트는 그 담요를 전달한 목적-인디언들에게 천염두를 감염시키기 위해-을 밝혀주는 기록을 남겼다. <ref>Calloway, ''Scratch of a Penn'', 73.</ref>
 
인디언들에게 천연두를 퍼트리기 위한 이 시도가 성공했는 지에 대한 여부는 불분명하다.<ref>For an overview of the evidence and historical interpretations, see Elizabeth A. Fenn, "Biological Warfare in Eighteenth-Century North America: Beyond Jeffery Amherst", ''The Journal of American History'', vol. 86, no. 4 (March 2000), 1552–80.</ref> 폰티액 전쟁 중 많은 인디언이 천연두로 죽었기 때문에, 프랜시스 제닝스와 같은 역사학자는 이 시도가 “분명히 효과적이었다!”고 주장을 했다.<ref>Jennings, ''Empire of Fortune'', 447–48.</ref> 그러나 이후의 많은 학자들은 천연두가 담요 때문에 발발했는 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증언록에 의해면, 천연두는 담요 전달 사건 이전에 이미 오하이오 인디언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었던 것이다.<ref>McConnell, ''A Country Between'', 195; Dixon, ''Never Come to Peace'', 154.</ref> 이미 천연두가 이 지역에서 창궐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경로를 통해 천연두가 인디언 마을에도 도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목격자들은 전쟁 이후 천연두에 걸린 인디언 전사들이 오히려 백인 정착민들을 감염시켰으며, 그들을 돌려보내서 병을 확산시켰다고 보고했다.<ref>Dixon, ''Never Come to Peace'', 154; McConnell, ''A Country Between'', 195.</ref> 역사학자인 마이클 맥코넬은 “천연두를 생화학 무기로 사용하기 위한 영국의 노력은 필요하지도 않았고, 효율적이도 못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ref>McConnell, ''A County Between'', 195–96.</ref> 역사학자 데이비드 딕슨은 “핏 요새 밖의 인디언들이 명확히 천연두 창궐로 감염된 것은 아니다.”<ref>Dixon, ''Never Come to Peace'', 154.</ref> “인디언들이 많은 감염 경로를 통해 그 치명적인 질병에 걸렸는지 모르겠지만, 피트 요새의 감염된 담요는 그러한 감염 경로 중 하나에 불과했다”고 결론지었다.<ref>Dixon, ''Never Come to Peace'', 152–55; McConnell, ''A Country Between'', 195–96; Dowd, ''War under Heaven'', 190.<name="ReferenceB"/ref>
 
=== 부시런과 데블스 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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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민들에 대한 인디언의 습격은 1764년 봄과 여름도 한층 가열되었다. 그 해 가장 피해 심했던 곳은 100명 이상의 이주민이 살해당한 버지니아였다.<ref>Nester, ''"Haughty Conquerors"'', 194.</ref> [[5월 26일]], 메릴랜드의 컴버랜드 요새 근처의 농장에서 일하던 15명의 이주민들이 살해당했다. [[6월 14일]], 펜실베니아 루돈 요새 근처에서는 약 13명의 정착민이 살해당하고 집이 불탔다. 가장 악랄한 습격은 [[7월 26일]]에 일어났다. 오늘날 펜실베니아 프랭클린 카운티에서 4명의 델라웨어족 전사가 학교를 급습하여 교사 1명과 어린이 10명을 죽이고 머리가죽을 벗긴 것이다. 이러한 사건에 직면한 펜실베니아 의회는 펜 주지사의 승인을 얻어, 프렌치 인디언 전쟁 때 열린 두피 보상제를 재도입 했다. 이 제도는 여성을 포함 10살 이상의 인디언을 죽여 머리가죽을 가져오면 상금을 지급하는 것이었다.<ref>Dixon, ''Never Come to Peace'', 222–24; Nester, ''"Haughty Conquerors"'', 194.</ref>
 
[[1763년]] 8월, 소요사태에 책임을 지고 있던 애머스트는 무역위원회의에 의해 런던으로 소환당했고, 토마스 게이지 장군이 뒤를 이었다. [[1764년]], 게이지는 두 원정대를 서부로 보내 반란을 진압하고, 포로가 된 영국인을 구출하고 전쟁에 책임 있는 인디언을 체포하려 했다. 역사가 프레드 앤더슨에 따르면 게이지 전략은 원래 애머스트가 세운 것이며, 전쟁을 끝내기보다는 인디언을 처벌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1년 이상 끌게 되었다. 게이지의 전략이 애머스트의 것과 달랐던 점은 나이아가라에서 윌리엄 존슨을 통해 평화 협상을 진행한 것이며, “도끼를 치울” 준비가 있던 인디언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 것이었다. <ref>Anderson, ''Crucible of War'', 553, 617–20.</ref>
 
=== 나이아가라 요새 협정 ===
[[1764년]] 7월부터 8월까지 존슨은 주로 [[이로쿼이 족]]으로 구성된 약 2,000명의 인디언들과 [[나이아가라 요새]]에서 조약 협상을 벌였다. 이로쿼이 족은 대부분 전쟁에서 제삼자였지만, 제네시강 계곡의 [[세네카 족]]이 영국에 무기를 들고 저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존슨은 그들을 동맹의 사슬로 되돌리려 했다. 데블스 홀 매복에 대한 배상으로서 세네카 족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나이아가라 수송로를 영국군에게 양도할 것을 강요당했다. 존슨은 이로쿼이 족 전사 한 무리를 오하이오 인디언에 파견하도록 설득했다. 이로쿼이 원정대는 많은 델라웨어족을 포로로 잡았고, [[서스쿼해나 강]] 계곡에 버려진 [[델라웨어족]]과 [[쇼니족]]의 마을을 파괴했다. 그러나 존슨이 기대한만큼 전쟁에 공헌하지는 않았다. <ref>For Niagara treaty, see McConnell, ''A Country Between'', 197–99; Dixon, ''Never Come to Peace'', 219–20, 228; Dowd, ''War under Heaven'', 151–53.</ref>
 
[[파일:Indians giving a talk to Bouquet.jpg|thumb|left|[[벤자민 웨스트]]가 1765년 그린 부켓의 협상. 인디언 측 원주민이 왐펌 벨트를 들고 있다. [[이스턴 우드랜즈]]에서는 외교에서 필수적이었다.]]
 
=== 두 원정대 ===
나이아가라 요새 일대를 확보한 영국군은 두 개의 원정대를 서쪽으로 파병했다. 첫 번째 원정대는 존 브래드스트리트 대령이 지휘하는 것으로 배를 타고 이리 호를 건너 디트로이트를 보강하기 위한 조치였다. 브래드스트리트는 디트로이트 주변의 인디언을 진압하고, 그 남쪽 오하이오 영토에 진입할 예정이었다. 부켓 대령이 이끄는 두 번째 원정대는 피트 요새를 나와 서쪽으로 진군하여, 오하이오에 두 번째 전선을 만들려고 하였다.
 
[[1764년]] 8월, 브래드스트리트는 1,200여명의 병사와 윌리엄 존슨에 의해 징병된 인디언 동맹 대표단과 함께 슐로서 요새를 출발했다. 브래드스트리트는 인디언을 힘으로 굴복시키기 위한 전력이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8월 12일]]에 [[이리 호]] 강풍 때문에 프레스 섬에 머물렀을 때, 구야스타가 이끄는 오하이오 인디언 부족 대표와 화해 협상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브래드스트리트는 단순한 정전 이상의 평화 협정을 맺고, 아직 출발도 하지 않았던 부켓 원정대를 멈추게 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월권행위를 하고 말았다. 게이지와 존슨 그리고 부켓은 브래드스트리트가 월권행위를 했다는 것을 듣고 격분했다. 게이지는 브래드스트리트가 속아 오하이오 영토에 대한 공격 임무를 포기했다고 생각했고, 그 협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게이지가 옳았지도 모른다. 오하이오 인디언 부족은 9월에 실시된 브래드스트리트의 2차 회의에서 약속한 포로를 반환하지 않았으며, 일부 쇼니족들은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프랑스인들의 협력을 얻으려고 했다.<ref>For Bradstreet along Lake Erie, see White, ''Middle Ground'', 291–92; McConnell, ''A Country Between'', 199–200; Dixon, ''Never Come to Peace'', 228–29; Dowd, ''War under Heaven'', 155–58. Dowd writes that Bradstreet's Native escort numbered "some six hundred" (p. 155), while Dixon gives it as "more than 250" (p. 228).</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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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티액 전쟁은 전통적으로 인디언 측의 패배로 간주되어 왔지만<ref>Peckham, ''Indian Uprising'', 322.</ref>, 현대의 학자들은 군사적 교착상태로 여기고 있다. 인디언은 영국군을 몰아내는데 실패했지만, 영국도 인디언을 정복하지 못했다. 전장에서의 승리가 아닌 협상과 중재로 전쟁이 끝난 것이다.<ref>Dixon, ''Never Come to Peace'', 242–43; White, ''Middle Ground'', 289; McConnell, "Introduction", xv.</ref> 인디언은 영국 정부에 애머스트의 정책을 포기시켰고, 프랑스 - 인디언 동맹에서 정형화되었던 인디언 교류 방식을 답습하여 일종의 승리를 쟁취했다고 말할 수 있다.<ref>White, ''Middle Ground'', 305–09; Calloway, ''Scratch of a Pen'', 76; Richter, ''Facing East'', 210.</ref>
 
영국 정착민과 인디언과의 관계는, 프렌치 인디언 전쟁 때 극도의 긴장 관계에 있었지만, 폰티액 전쟁 동안에 오히려 완화됐다.<ref>Calloway, ''Scratch of a Pen'', 77.</ref> 사학자 데이비드 딕슨은 “폰티액 전쟁은 양측 모두 학살의 광기에 취해 버린 듯, 그 무서운 폭력이 전례가 없던 것이었다.”고 평가했다.<ref>Dixon, ''Never Come to Peace'', xiii.</ref> 사학자 다니엘 리히터는 인디언이 영국군을 몰아내려는 한 것과 팩스턴 보이즈가 백인 사회에서 인디언을 없애려고 한 것을 [[인종 청소]]의 예라고 생각했다.<ref>Richter, ''Facing East'', 190–91.</ref> 전쟁에 관련된 양측 모두 정착민과 원주민은 본질적으로 다르며, 공생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리히터는 이 전쟁이 “모든 원주민은 ‘인디언’이고 각 유럽계 미국인은 ‘백인’이며, 한쪽은 다른 한쪽을 파괴하기 위해 결속하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져 오게 되었다.”고 평했다. <ref>Richter, ''Facing East'', 208.</ref>
 
영국 정부는 이주민과 인디언을 분리해 두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763년]] [[10월 7일]], 〈[[1763년 파리 조약]]〉 후에 영국령 북아메리카를 재구성하기 위해 국왕령으로 〈[[1763년 선언]]〉이 나왔다. 이 선언은 폰티액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이미 발효되어 있었지만, 봉기 소식이 런던에 도착한 후 서둘러 선언된 바 있다. 영국 정부는 영국의 식민지와 [[애팔래치아 산맥]]의 서쪽에 있는 인디언 땅 사이에 경계선을 그었다. 이 결과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미시시피 강 및 플로리다에서 뉴펀들랜드에 이르기 거대한 인디언 점유 영토가 완성되었다. 영국 정부는 이주민이 인디언의 땅을 가로 지르는 것을 금지시키면, ‘폰티액 전쟁’과 같은 분쟁이 더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사학자 콜린 캘러웨이는 “〈1763년 선언〉은 인디언과 백인의 교류가 아니라 인종 격리를 특징으로 하는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고 밝혔다.<ref>Calloway, ''Scratch of a Pen'', 9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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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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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깥 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