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카가 요시미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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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8년]]([[쇼헤이]] 13년/[[엔분]] 3년) 8월 22일<ref>이하 월일은 모두 음력으로 표기한다.</ref>, [[교토]] 가스가 히가시토인(春日東洞院)에 있는 [[막부]] [[만도코로]]시쓰지(政所執事) [[이세 사다쓰구]](伊勢貞継)의 저택에서 태어났다. 조부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사망으로부터 딱 100일 째 되는 날이었다. 요시미쓰는 장남이 아니었지만, 요시아키라와 그의 정실 [[시부카와 유키코]](渋川幸子)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센주오(千寿王)가 요절한 뒤 유키코가 자식을 낳지 못하여 요시미쓰가 적남으로 취급받았다.
 
요시미쓰가 어렸을 적의 막부는 [[남조 (일본)|남조]]와의 항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아시카가 가문의 내분인 [[간노의 요란]](観応の擾乱) 이래 막정을 둘러싼 다툼이 점점 심각해져 갔다. 이윽고 정쟁으로 실각한 [[호소카와 기요우지]](細川清氏) 등의 유력 무장이 남조 세력에 가담하여 1361년(쇼헤이 16년/[[고안]] 원년)에는 기요우지와 남조의 [[구스노키 마사노리]](楠木正儀)등이 교토를 점령하여 요시미쓰는 [[아카마쓰 노리스케]](赤松則祐)의 거성 [[하리마 국]] 시로바타 성(白旗城)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다음해에는 막부·북조 측이 교토를 탈환했기 때문에 귀경했으나, 귀로에 [[셋쓰 국]]에 묵었을 때 그 장소([[아마가사키]](尼崎) 근처)의 좋은 경치를 마음에 들어 하여“여기 경치가 좋으니까 교토에 가지고 돌아가자. 너희들이 짊어지고 가”라고 가신들에게 명하였다고 한다. [[1367년]](쇼헤이 22년/[[조지]] 6년)에 부친 요시아키라가 병사하자 요시미쓰는 10세의 나이로 무로마치 막부 제 3대 쇼군이 되었다.
 
[[1368년]](쇼헤이 23년/[[오안 (연호)|오안]] 원년)에 효조하지메(評定始)를 행하고 4월에는 [[간레이]] [[호소카와 요리유키]](細川頼之)를 가관역(加冠役)으로 하여 성인식(元服)을 치뤘다. 이 때 가관역을 맡은 요리유키를 비롯하여 중요한 역할은 모두 호소카와 가문에서 담당하였다. 1369년(쇼헤이 24년/오안 2년)에는 정식으로 쇼군에 취임했다. 막부 정치는 호소카와 요리유키를 필두로 아시카가 일문의 슈고 다이묘가 주도하였다. 요리유키는 오안 대법을 실시하여 토지 지배를 강고하게 만들고, 교토와 가마쿠라의 오산 제도를 정비하여 종교 통제를 강화했다. 또한 남조 최대의 세력권이었던 규슈에 [[이마가와 사다요]](今川貞世, 이마가와 료슌)·[[오우치 요시히로]](大内義弘)을 파견하여 남조 세력을 약체화시켜 막부 권력을 강화했다. 1374년([[분추]] 3년/오안 7년) 요시미쓰는 [[히노 나리코]](日野業子)를 부인으로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