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코쿠지 에케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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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모리 가문이 스승 엔신에 귀의한 관계로, 모리 가문의 외교승이 된다. [[겐키]] 원년([[1570년]]) 모리 가문과 대립하고 있던 [[분고노쿠니|분고]]의 [[오토모 소린]]과의 화친을 성사시킨다.
 
[[덴쇼 (1573년)|덴쇼]] 10년([[1582년]]) 모리 가문은 [[하시바 히데요시]](후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고쿠]] 공략의 발판으로 [[빗추 국|빗추]] [[다카마쓰 성]]으로 진군하자, 대치하였고, 공방전 중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횡사하였다. 이 때, 하시바 히데요시는 이 사실을 숨기고 모리 가문과 화친을 제안한다. 이에 외교승이었던 에케이는 이를 수락한다. 이는 에케이 자신이 히데요시의 약진을 예측해 히데요시의 제안을 수락한 것이라고 한다.
 
덴쇼 13년([[1585년]]) 음력 1월, [[하시바 히데요시]]가 모리 가문에 정식으로 복속할 것을 요구한다. 이에 이를 수락하고, 히데요시의 신임을 얻는다. 그리고, [[시코쿠]] 평정 후, [[이요노쿠니|이요 국]]내 2만 3천 석의 영지를 하사받았으며, 덴쇼 14년([[1586년]]) [[규슈]] 평정 후, 6만석으로 가증되었다. 승려이면서 다이묘의 신분에 오르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또, 히데요시의 측근이 되어 전국에서 행해진 검지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분로쿠]] 원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예하 부대에 속해 [[웅치 전투]], [[정암진 전투]] 등을 지휘하였다.
 
[[게이초]] 4년([[1599년]]) 교토의 겐닌지를 재흥하는 데 힘쓴다.
 
에케이는 모리 가문 중 친히데요시파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조우가 깊었지만, 다카카게 사후, 친이에야스파인 [[깃카와 히로이에]]와 반목한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쓰나리]]를 도와 서군에 참전하였고, 이에 더해 모리 가문의 수장 [[모리 데루모토]]를 설득하여 서군 총대장으로 옹립하는데 조력했다.
 
음력 9월 15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모리 히데모토]], 깃카와 히로이에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 군의 후방에 진을 쳤다. 하지만, 바로 앞에 진을 친 깃카와 히로이에에 막혀 군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는 깃카와 히로이에가 은밀히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내통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