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 (1476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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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李芑, [[1476년]] [[10월 26일]] ~ [[1552년]] [[4월 28일]])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 권신이다. [[생육신]]과 [[사육신]]의 친인척으로 [[이원수]]의 당숙이다. [[윤원형]], [[윤원로]], [[윤춘년]], [[임백령]] 등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尹任) 일파와 사림을 제거하는데 가담했다. 율곡 [[이이]]와 [[이우 (1542년)|이우]] 형제의 재종조부이다.
 
[[149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01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문신이었으나 장인 [[김진]](金震)이 탐관오리인 탓에 연루되어 요직에 진출하지 못했으나 회재 [[이언적]](李彦迪)의 도움으로 요직에 진출하였으며, [[1511년]]의 정시에 다시 합격하였다. [[병마절도사]]와 로 변방에 근무하여 [[여진족]]을 토벌하는데 기여하였으며 [[역대 한성판윤|판한성부사]]를 세 번 역임했다. [[1545년]] [[우의정]]이 된뒤 겸 [[병조판서]]와 [[좌의정]], 찬집청 당상, 영중추부사를 거쳐 [[1549년]]부터 [[영의정]]을 지냈다. 문무의 재주를 겸비했으나 장인이 탐관오리였고, 그 자신도 [[을사사화]]를 날조하였으며 반대파를 숙청한 탓에 재주를 인정받지 못했다. 율곡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는 그의 5촌 조카로, 한때 [[이원수]]는 그의 문하에 찾아가려 하였으나 [[신사임당]]이 이를 말렸다고 한다. [[성삼문]]은 그의 외가 친족이며, [[생육신]]의 한사람인 [[성담수]], [[성담년]]의 외조카였다.
 
강평공(康平公) [[이명신]](李明晨)의 증손이고, 그의 10촌 종조부 [[이변]]은 충무공 [[이순신]]의 5대조였다. [[을사사화]]의 주모자 중의 한사람으로 지목되며 [[을사사화]]에 가담한 공로로 [[보익공신]](保翼功臣) 1등으로 책록되고 풍성부원군(豊城府院君)에 봉군되었다. [[서울]] 출신으로 본관은 [[덕수 이씨|덕수]](德水). 자(字)는 문중(文仲)이고 호는 경재(敬齋).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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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방 근무 ====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승진하였지만, 삼사를 비롯한 청요의 직책이나 6경 등 서경(署經)을 필요로 하는 지위에는 나아가지 못하였다. 그가 요직에 오르려 할 때마다 장인 [[김진]]이김진이 군수 재직 중 뇌물을 받은 일로 장리(贓吏)의 사위라 하여 반대하였으며, 그의 글재주를 안타깝게 여겨 허통(許通)하려 하자 조정 관원이 모두 안 된다고 하였으나, 이언적이 당시 대사헌으로서 유독 될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허통<ref>서자와 노비, 중인 외에도 탐관오리의 자손, 역적의 가까운 친족들 역시 청요직에 앉을 수 없었다.</ref>하게 되었다.<ref>그러나 이기는 후에 [[윤원형]] 등과 손잡고 [[을사사화]]에 가담하는데, [[이언적]]은 이때 숙청된다.</ref>
 
이후 종사관, 종성부사 등을 거쳐 내직인 [[공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1514년]] [[함경북도]][[병마절도사]]로 부임했다. 1519년 [[1월]] 형조참의를 거쳐 다시 외직으로 나가 그해 [[9월]] 경원부사(慶源府使), [[1519년]] [[9월]] 의주목사를 역임하였다. 요직에는 제수되지 못했으나 변방에 근무하면서 불평 불만 없이 소임을 다하여 임금의 신임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