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종 (1959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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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인용|url=http://www.ytn.co.kr/_ln/0103_201503051437513442|제목 = <nowiki>김기종이 몸 담고 있는 우리마당통일문화연구소는 어떤 곳?</nowiki>|날짜=2015-03-05|확인날짜=|출판사=YTN}}</ref>
 
[[2011년]] 12월 2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하자 김기종은 [[국가보안법 피해자 모임]] 회원 일부와 서울 [[덕수궁]] 앞 공터에 분향소 설치를 시도하였고,<ref>[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9204598&code=61121111&cp=nv 김기종, 김정일 분향소 설치에도 관여],국민일보,2015-03-05</ref> 그것을 저지하려는 보수단체와의 대치 과정에서 10여명으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해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김기종은 블로그 글에서 자신이 2011년 12월 26일 덕수궁, 2011년 12월30일 사무실, 2012년 2월25일 광화문 네거리에서 세차례에 걸쳐 보수성향의 단체인 [[어버이연합]]으로부터 전치 4주의 폭행을 당했으며 이 사건에 대해 고소하였으나 검찰이 증거 불충분으로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렸다고 주장했다.그리고 고소장 3장 접수 끝에 약식기소를 통해 벌금형을 받아냈다고 밝혔다.그 후 김기종은 [[어버이연합]]이 입주한 건물 앞에서 '''폭력집단 어버이연합 해체하라'''는 피켓을 들고 1인시위를 했다.<ref>[http://daily.hankooki.com/lpage/politics/201503/dh20150305094529137430.htm 리퍼트 대사 피습, 용의자 '우리마당 대표' 김기종은 누구],데일리한국,2015-03-05</ref><ref>김기종의 블로그</ref><ref>{{뉴스 인용|url=http://www.yonhapnews.co.kr/society/2011/12/26/0701000000AKR20111226183700004.HTML|제목=대한문 앞 김정일 분향소 설치 무산|날짜=2011-12-26|확인날짜=|출판사=연합뉴스|저자=이지헌}}</ref>
 
2014년 12월 19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에 의해 위헌정당으로 해산된 [[통합진보당]], 법원이 이적단체로 규정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등과 함께 《전쟁반대 평화실현 국민행동》의 일원으로 활동했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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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 ==
=== 우리마당 피습 사건 ===
1988년 8월 17일 새벽4시경, 4명의 괴한이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신촌역 부근 우리마당 사무실을 습격<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81800289107001&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8-08-18&officeId=00028&pageNo=7&printNo=82&publishType=00010 문화운동단체에 새벽 괴한 난입],한겨레,1988년 8월 18일</ref>해 자물쇠를 부수고 이 단체 남자 회원을 각목 등으로 집단구타 , 실신시킨 뒤 이들 중 1명이 또 다른 여자회원을 폭행한 뒤 달아났다고 알려진 사건이다. 당시 경찰은 "사무실 안에 금품이 없어 도둑이나 강도가 침입할 이유가 없으며 범인들이 지휘자인 듯한 1명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행동했고 4명 모두 머리를 짧게 깎은 단정한 차림이었으며 사무실 안의 서류만을 뒤진 점 등으로 미루어 단순 강도범의 소행으로 보기에는 석연찮은 점이 많다"는 것이 현장 초동 수사의 결론이었지만, 사건발생 직후 단순 강도범들에 의한 우발적인 범행으로 추정, 주변 불량배와 동일수법 전과자 등 우범자들을 상대로 한 수사에만 초점을 맞춘 채 특정목적의특정 목적의 조직적인 범행 가능성은 초동수사단계에서초동 수사 부터단계에서부터 배제했다.
 
김기종씨는 "이 사건이 8.15 남북학생회담이 끝난 직후 사건이 발생했으며 우리마당이 재야문화단체로는 최초로 통일마당 큰잔치 행사를 개최할 계획을 세운 직후에 일어났다는 점에서 극우세력에 의한 테러일 가능성이 높은데도 경찰은 이 부분에 대한 수사는 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한편 이 사건과 관련, 자신을 중앙경제신문 오홍근 부장테러사건<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82500209211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08-25&officeId=00020&pageNo=11&printNo=20583&publishType=00020 오홍근 기자 테러 용의자 군인 4명 신병 확보]</ref>을 언론에 제보한 사람이라고 밝힌 한 시민이 9월 27일 서대문경찰서 기자실로 전화를 걸어와 우리마당 피습사건도 특수조직의 치밀한 사전계획에 의해 저질러진 테러였다고 주장해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92700209214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09-27&officeId=00020&pageNo=14&printNo=20612&publishType=00020 동아일보 1988년 9월 27일자]</ref>
당시 경찰은 제보에 나온 인물들의 신원 확인 결과 이들이 가공의 인물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제보의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판단했지만,<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92900329215015&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8-09-29&officeId=00032&pageNo=15&printNo=13234&publishType=00020 우리마당 피습제보 신빙성 없어 원점수사], 경향신문, 1988-09-29</ref> 야당인 [[평민당]] 측에선 제보를 토대로 습격사건이 육군정보사 소속 군인의 소행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정치문제화 하였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사건의 진상조사와 법률지원을 자원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421&aid=0001298220 '우리마당 사건' 트라우마?…김기종, 극단 행동들]</ref>
<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93000209202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09-30&officeId=00020&pageNo=2&printNo=20615&publishType=00020 '우리마당 사건 철저히 파헤치자' 평민서 정치문제화],동아일보,1988-09-30</ref> 결국 야당 국회의원들은 1988년 10월8일 육군 정보사에 대해 사상 첫 국정감사를 벌여 우리마당 피습사건에 대한 정보사 개입여부를 따졌다. 답변에 나선 정보사령관은 "제보자가 우리마당 사건에 개입했다고 주장한 하사관 4명과 장교 1명의 실제 근무여부를 확인한 결과 이름이 유사한 사람은 2명으로 이중 1명은 하사관,1명은 장교였다."고 밝혔다.정보사령관은 그러나 "이들 두명은 모두 계급이 달랐으며, 그런 일과 무관한부서에 근무하고 있다"고 우리마당 사건 개입 소문을 정식으로 부인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100900289101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10-09&officeId=00028&pageNo=1&printNo=128&publishType=00010 정보사 정치개입 여부 추궁],한겨레,1988-10-09</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81800289107001&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8-08-18&officeId=00028&pageNo=7&printNo=82&publishType=00010 문화운동단체에 새벽 괴한 난입],한겨레,1988-08-18</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100100289101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10-01&officeId=00028&pageNo=1&printNo=120&publishType=00010 "우리마당 사건도 정보사 소행 평민,제보 발표 이규홍준장지시"],한겨레,1988-10-01</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10010028910100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10-01&officeId=00028&pageNo=1&printNo=120&publishType=00010 정보사 '우리마당' 사건과 무관 육군해명], 한겨레, 1988-10-01</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93000329215008&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8-09-30&officeId=00032&pageNo=15&printNo=13235&publishType=00020 "우리마당 습격은 군특수요원 범행" 평민당 주장],경향신문,1988-09-30</ref>
야당인 [[평민당]] 측에선 제보를 토대로 습격사건이 육군정보사 소속 군인의 소행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정치문제화 하였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사건의 진상조사와 법률지원을 자원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421&aid=0001298220 '우리마당 사건' 트라우마?…김기종, 극단 행동들]</ref>
<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93000209202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09-30&officeId=00020&pageNo=2&printNo=20615&publishType=00020 '우리마당 사건 철저히 파헤치자' 평민서 정치문제화],동아일보,1988-09-30</ref>
결국 야당 국회의원들은 1988년 10월8일 육군 정보사에 대해 사상 첫 국정감사를 벌여 우리마당 피습사건에 대한 정보사 개입여부를 따졌다. 답변에 나선 정보사령관은 "제보자가 우리마당 사건에 개입했다고 주장한 하사관 4명과 장교 1명의 실제 근무여부를 확인한 결과 이름이 유사한 사람은 2명으로 이중 1명은 하사관,1명은 장교였다."고 밝혔다.정보사령관은 그러나 "이들 두명은 모두 계급이 달랐으며,그런 일과 무관한부서에 근무하고 있다"고 우리마당 사건 개입 소문을 정식으로 부인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100900289101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10-09&officeId=00028&pageNo=1&printNo=128&publishType=00010 정보사 정치개입 여부 추궁],한겨레,1988-10-09</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81800289107001&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8-08-18&officeId=00028&pageNo=7&printNo=82&publishType=00010 문화운동단체에 새벽 괴한 난입],한겨레,1988-08-18</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100100289101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10-01&officeId=00028&pageNo=1&printNo=120&publishType=00010 "우리마당 사건도 정보사 소행 평민,제보 발표 이규홍준장지시"],한겨레,1988-10-01</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10010028910100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10-01&officeId=00028&pageNo=1&printNo=120&publishType=00010 정보사 '우리마당' 사건과 무관 육군해명], 한겨레, 1988-10-01</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93000329215008&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8-09-30&officeId=00032&pageNo=15&printNo=13235&publishType=00020 "우리마당 습격은 군특수요원 범행" 평민당 주장],경향신문,1988-09-30</ref>
 
==== 우리마당 피습 항의 분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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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신속한 논평을 통해 [[마크 리퍼트]] 대사의 피습 사건이 전쟁광 미국에 가해진 응당한 징벌이라고 주장했다. [[조선중앙통신]]은 "남조선 미국 대사 [[마크 리퍼트]]가 한 강연회장에서 남조선 시민단체 성원으로부터 징벌을 받았다."며, "전쟁광 미국에 가해진 응당한 징벌"이라고 논평했다. 또한 김기종의 흉기 공격을 "정의의 칼 세례"로 미화하며 김씨를 적극 옹호하였다.<ref>[http://news.kbs.co.kr/news/NewsView.do?SEARCH_NEWS_CODE=3031399& 북, 리퍼트 피습에 “미국에 가해진 응당한 징벌”], KBS News, 2015년 3월 6일</ref>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김기종의 [[테러]]를 [[안중근]] 의사의 의거로 비유하며 옹호했다.<ref>[http://news.kbs.co.kr/news/NewsView.do?SEARCH_NEWS_CODE=3032463&ref=A 북한, ‘안중근 의거’ 빗대 김기종 또 옹호], KBS, 2015년 3월 8일</ref>
 
[[2015년]] [[3월 6일]] 경찰은 리퍼트 미국 대사에게 흉기를 휘두른 김기종에 대해 살인미수와 외교사절 폭행, 업무방해 혐의 등 세 가지 혐의로 법원으로부터 구속영장을 받부받아 구속했다. "2011년 김정일 분향소 설치 시도와 그간의 반미 집회, 강연 발언 등을 볼 때 그가 북의 주장에 동조하고 선전할 목적으로 이적표현물을 소지한 걸로 판단된다"고 밝힌 경찰의 김기종 주거지와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으로 압수한 '이적성이 강하게 의심되는' 문건 30점에 대해 외부기관인 대학 소속 연구소 등 7개 기관에 감정을 의뢰한 결과<ref>[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3/09/2015030990003.html 경찰, 김기종 이적성 의심서적 30점 감정 의뢰]</ref> [[김정일]]의 《영화예술론》, 이적 단체 [[범민련]]의 《민족의 진로》, 주체사상 학습 자료인 《정치사상 강좌》, 옛 [[통합진보당]] 등이 참여한 《전쟁반대 평화실현 국민행동 회의록》 등 13건을 이적 문건으로 분류했으며 수사 과정에서 김기종이 "김일성은 항일운동을 했고 38선 이북을 접수한 뒤 자기 국가를 건설해 현재까지 잘 이끌어오는 걸 봤을 때 20세기 훌륭한 민족 지도자로 생각한다" "(남에는 김일성만큼 훌륭한 사람이) 없다" "우리나라는 반식민지 사회, 북한은 자주적인 정권"이라고 말하고 북의 지령으로 2005년 맥아더 동상 철거 시위를 벌인 이적 단체인 우리민족 연방제통일추진회의 대표인 김수남과 1년간 60여 차례 통화한 사실도 확인하여 [[국가보안법]] 혐의 적용을 검토하고 있다. 김수남은 김기종을 면회하러 가서 "김기종은 종북이 아니며 옳은 일을 했다"고 말했다. <ref>[http://news.kbs.co.kr/news/NewsView.do?SEARCH_NEWS_CODE=3031925 김기종 ‘살인미수’ 구속영장…국보법 위반도 검토], KBS News, 2015년 3월 6일</ref><ref>[http://www.ytn.co.kr/_ln/0301_201503091610267763 김기종, 치료 받기 위해 경찰병원 이동]</ref><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3/10/2015031000390.html 김기종 "김일성, 20세기 훌륭한 민족 지도자"], 조선일보, 2015-03-10</ref>
 
==== 주변인물 반응 ====
* 2010년 7월 일본대사 콘크리트 투척 사건 때 김기종의 변호를 맡았던 [[박찬종]] 변호사는 “그 때에는 완전히 항일민족주의자였다”며 “그 뒤로 5년 동안 반미주의자로 외골수가 돼버린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ref>[http://www.dailian.co.kr/news/view/492276/?sc=naver 김기종 변호했던 박찬종 "2010년엔 항일운동가였는데..."]</ref>
*김기종의 대학 후배였던후배인 [[유은혜]] [[새정치민주연합]] 대변인은 김기종에 대해 "극단적 민족주의자에 가까운 것 같다"고 평가했다. "김씨는 학교 다니면서 많은 문화운동, 독도지킴이 운동 등을 세게 해왔던 분"이라며 "일본대사관에 콘크리트 조각을 던져서 검거된 적도 있고 분신을 하는 등 개인적으로도 돌출행동을 반복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유 대변인은 "대학 졸업 후 30여년 동안 계속 독도 서명운동 등을 했는데 돌출행동을 반복하다보니 신뢰감을 충분히 주지 못해 활동하는데 어려움도 겪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김기종에 대해 "극단적 민족주의자에 가까운 것 같다"고 평가했다.<ref>[http://the300.mt.co.kr/newsView.html?no=2015030511207631790 유은혜 "김기종, 극단적 민족주의자에 가깝다"]</ref>
* 이웃과 지인들은 김씨가 "평소 주변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돌발행동을 일삼았다"고 입을 모았다. 90년대 초부터 전통그림자극인 '만석중놀이' 복원 작업을 함께 했다는 A씨는 김씨에 대해 "몸과 정신이 많이 아프다"며 "특히 정신분열증세가 있는 것 같았다"고 말하면서 김씨가 전통 문화 복원과 독도지키기, 통일 추진 등 뜻 깊은 일에 앞장섰으나 성과가 없어 인정받지 못했다고 전했다. 친한 선후배 사이에서 대놓고 '그만하라'고 만류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전해졌다. A씨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 말을 듣지 않으니 극단적인 선택을 한 듯 하다"며 "스스로 독립투사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8&aid=0003431331 "'美대사 습격' 김기종, 북한사람도 30분 이상 대화 못할 것"]</ref>
* [[동아일보]] 송평인 논설위원은 김기종에 대해 "단소 하나 제대로 불지 못하는 실기맹(盲)이었다. 그렇다고 뛰어난 이론가도 아니었다. 말은 감정이 앞서 산만했으며 논리라는 것도 맹목적 ‘우리 것’ 주의에 가까웠다. 그가 남다른 점은 열정이었다. 다만 온갖 우리 것에 대한 관심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벌여놓고는 수습은 잘하지 못했다."고 밝혔다.<ref>[http://news.donga.com/3/all/20150309/70034640/1 내가 대학생 때부터 본 김기종]</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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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김기종이 살아온 이력을 추적해보면 그의 정치적 성향은 한국의 진보 좌파의 입장과 유사하다. 가령 그가 주장해온 한미연합훈련반대나 [[전시 작전통제권]] 즉시환수, [[한미연합사]] 해체<ref>[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50305000517&md=20150305153215_BL 김기종은 누구? 테러 왜? 美 외교ㆍ안보 규탄 활동],헤럴드경제,2015-03-05</ref>는 진보 좌파 세력의 아젠다였다. 게다가 그는 블로그에서 수차례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김기종은 자신의 개인 블로그에 '소식 칼럼'이라는 글을 쓰면서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냈다.이는 보수성향의이는 네티즌으로부터보수단체로부터 종북으로 비판받을의심받을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용문|"결국 채택까지는 수많은 난관 가로막으며 버티고 있었지만 [[6.15 선언]]이라는 열매로 남북은 새로운 국면을 열어줍니다. 이제 남북 오고가는 과정에서 통일의 꿈이 펼쳐졌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5.24 조치]]라는 괴물이 불쑥 등장하면서 여러 상황들을,다시금 중단의 상태로 되돌려 놓고 맙니다. 따라서 현 정권의 선거 공약부터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나름대로 평화신뢰이면 충분했는데, 프로세스란 외래말도 복합됨이 의아했던 결과가 정책집행에 그대로 반영됩니다."<ref>2014년 9월 8일에 쓴 자신의 블로그 '2014년 9월1일 소식 칼럼 </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