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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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일은 [[1823년]]에 [[충청도]] [[홍주군|홍주]]에서 [[천주교]] 모태 신자로 태어났다. 후일에 그는 [[경상도]] [[문경]]의 여호목골에 정착하여 [[천주교]] [[공동체]]의 회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생계를 위해 [[농사]]를 지었다. 그는 결혼하여 몇 명의 자식을 두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발발했을 때, 그는 45세였다. 그는 키가 컸고 긴 수염을 갖고 있었다. 그는 소박한 성품을 가진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천주교]]를 믿었고, 여러 명의 [[교리]] [[교사]]를 배출하였다. 이윤일은 그러한 가문의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이윤일의 아들의 증언에 따르면, [[1866년]] [[11월 7일]]과 [[12월 6일]] 사이에, 포졸들이 그의 집을 습격하였을 때, 이윤일은 자신의 방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그들이 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도망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다른 [[천주교]]인들을 찾는 포졸들에게 이윤일은 자신은 [[천주교]]인이 맞지만, 이웃의 다른
[[상주시|상주]] 관장은 [[심문]]을 끝내고, 70 여명의 [[천주교]]인을 세 무리로 나누었다. 첫번째 무리는 자식이 있는 사람들과 배교한 사람들, 두번째 무리는 배교를 거부한 20여명, 세번째 무리는 이윤일과 같은 [[천주교]] [[공동체]]의 지도자들로 구성되었다. 관장은 [[한양]]에 있는 [[섭정]]자 [[흥선대원군]]과 상의한 끝에 [[1967년]] [[1월 4일]]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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