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대: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Yenam2 (토론 | 기여)
Yenam2 (토론 | 기여)
8번째 줄:
 
=== 구한말 활동 ===
그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종, 노비들을 면천시켜 주었으며 불쌍한 사람들을 그냥 보내지는 않았다. 구한 말 동학군들이 어느 이른 아침 노은을 경유할 때 동네의 한 소녀 아이가 행진하던 군의 대오를 가로지르자 군대가 부정탔다하며 아이를 총을 쏘아 죽이겠다고 횡포를 부렸다. 이 소식을 들은 홍승대는 급히 나서서 군의 책임자를 만나 설득하기를 '어린 아이가 아무 것도 모르고 한 행동을 어찌 목숨까지 빼앗아 무엇하느냐, 여자아이의 행동으로 군대가 부정탔다고 여긴다면 아이의 겉옷을 벗겨 나무에 걸고 거기다 총을 쏘는 것으로 대신하자라고 설득하여 의병들이 아이의 생명을 건진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충주 고을에는 그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한다. 또한 문중의노은면의 부자였던 문중 형님이 동학군의 요구를 기한 내에 준비하지 못하여 신변이 위태롭게 되어 그 대책을 홍승대에게 구하자 형님을 대신하여 동학군 대장을 만나러 갔으나 그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기가 어려워 신변이군법 처리가 논란 위태로와중에 졌을있을 때 마침 근처 마을의 농악 상수잡이 출신의 병사가 홍승대를 알아보고 달려와 기지를 발휘해 대장 앞에서 그를 외삼촌이라 부르며 외삼촌을 사형시키는 군대에 내가 어떻게 충성할 수 있겠느냐며 군복을 벗으니벗으며 기지를 발휘해 마침내 그를 풀어주었다는 일화도 전해 진다.
 
[[1910년]] [[충주군]]면민들의 천거로 [[노은면]] 면장을 맡았으나 결국 왜놈들 심부름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이듬해 그만두었다. 노은면장 재직 중 호적을 파기하여 종, 노비, 관청의 노비들도 모두 면천, 석방시켜 보내고 많은 빈민을 구제하는 정책을 시도하였다.
 
=== 생애 후반 ===
[[1924년]] 여름 [[충청북도지사]] [[박중양]]이 농번기에 1~2개월 이상 농민들을 함부로 징집하여 [[충주]] 국도를 닦고 나중에 임금을 주지 않자 홍승대는 충청북도지사 박중양을 상대로 하여 소송을 제기, [[경성]]으로 올라가 [[경성지방법원]]과 [[경성복심법원]]에서 결국 승소판결을 받고 돌아왔다. 그가 박중양 고소 건으로 [[경성]]에 올라갔을 때 일본헌병들이 집에 들어와 늘 진을 치고 있었다 하며, 훗날 그의 두 아들 홍춘식, 홍최식은 일본 경찰이 당시 몹씨 두려웠다고 회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