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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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과 교류하면서 그는 성리학적 이념과 사상을 심층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외에도 [[맹자]]의 성선설과 역성혁명론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부패한 사회의 현실을 보면서 맹자의 성선설에는 다소 회의적인 견해를 품게 되었다. 이때 그와 함께 공부했던 이들로는 포은 [[정몽주]], [[박의중]], [[윤소종]], [[이존오]], [[김구용 (고려)|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 [[박의중]], [[설장수]](偰長壽), [[박상충]] 및 5년 연하의 [[이숭인]]과 [[하륜]], 10년 연하의 [[권근]] 등이 있었는데 모두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었다. 정도전은 [[성균관]]에서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는데 특히 문장과 성리학에 능하였다.
 
대사성인 이색은 [[이제현]]과 [[백이정]], [[권부]], [[안향]] 등의 학통을 계승했는데, 이제현은 백이정의 [[문인]]이자 [[권보]]의 사위로 28살 때 원나라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와 성리학을 이루었다.<ref name="chung174">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174페이지</ref> 그의 학문은 이색으로 이어졌다. [[정몽주]], [[이숭인]], [[권근]] 등 고려 말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이색]]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들이다.<ref name="chung174"/>
당시 그는 [[권문세족]]들의 전횡 못지않게 [[불교]]는 국가 경제를 저해하고 민생을 황폐하게 하는 해악으로 보게 되었다. 이는 사원경제의 팽창과 타락, 민의 [[불교]]에 귀의 등으로 인한 조세수입의 궁핍과 부역의 징발 부재로 나타난 국가경영 존립의 위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삶조차 기약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사후 세계를 논한다는 것은 공허한 생각이라는 [[공자]]의 의견에 강하게 동조하게 된다. 이후 [[불교]]가 국가에 미치는 해악에 대한 비판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만년에 《[[불씨잡변]]》으로 집성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