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후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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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안]] 16년([[211년]]), [[조조]](曹操)는 [[종요]](鍾繇)를 보내 장로를 토벌하고자 했다. [[한수 (후한)|한수]](韓遂), [[마초 (촉한)|마초]](馬超) 등 서량의 군벌들은 자신들을 토벌하려는 것으로 여기고 조조에게 반기를 들어 동관까지 나아가서 조조와 싸웠으나 패퇴했다. 이때 관서 사람 수만 가가 장로에게로 달아났다. [[정은]](程銀), [[후선]](候選), [[이감 (후한)|이감]](李堪)은 마초와 함께 조조와 싸웠다가 져 이감은 죽고, 정은과 후선은 장로가 있는 한중으로 도주했다. 마초는 양주에서 다시 일어섰으나 결국 쫓겨나고 장로에게 의탁했다. 장로는 마초를 도강좨주로 임명하였다. 또 딸을 시집보내려 했으나 반대하는 말이 있어 무산되었다. 장로는 마초의 청을 받아들여 병사를 주어 양주를 회복하게 했으나, 이득이 없었다. 마초는 장로가 함께 일을 꾸미기에는 부족하였으므로 근심하다가, 장로를 떠나 [[유비]](劉備)에게 귀순한다.
 
건안 20년([[215년]]), 조조는 [[한중]](漢中)을 공격하였다. 장로는 항복하고자 했으나, 그의 아우인 [[장위 (후한)|장위]](張衛)가 따르지 않아 장위와 장수 [[양앙]](楊昻)이 수만 명을 거느리고 양평관에서 저항했다. 양평관이 함락되자 투항하려 하였으나, 염포의 의견에 따라 파중으로 후퇴하여 항거하였다. 떠날 때 측근에서 창고와 재화를 불태우고 떠나기를 원했는데, 장로가 “보화와 창고는 국가의 소유다.”라고 하고 그저 봉해 놓고 떠났다. 조조는 한중을 점령한 후, 한녕군이란 이름을 옛날의 한중군으로 되돌렸다. 11월, 장로는 드디어 조조에게 항복했다. 장로의 본의는 저항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또 창고를 태우지 않은 것을 들은 조조는 장로를 매우 칭찬하였다. 이에 장로는 마초가 버리고 간 처자식 중에 마초의 아내를 염포에게 시녀로 내주었고 마초의 아들 [[마추]]를 참수해서 조조에게 바쳤다. 염포는 마초의 아내를 자신의 첩으로 삼았다. 조조는 사람을 보내 장로를 위로하고 진남장군(鎭南將軍)에 임명하고 빈객의 예로 대우했으며, 낭중후(閬中侯)로 삼아 식읍 만 호를 주었다. 또 다섯 아들과 염포를 열후에 봉하고, 딸은 [[조우]](曹宇)의 아내로 삼았다.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