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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일순]](姜一淳, 1871년 음력 9월 19일 ~ 1909년 음력 6월 24일)은 [[정여립]] 집터 바로 옆 구릿골(동곡마을)에 약방(광제국·廣濟局)을 차려놓고 구한말 절망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했는데 특히 여성과 백정 무당이 존경받고 서자와 상민이 무시당하지 않는 후천개벽의 세상을 역설했고 그곳에서 서른여덟에 눈을 감았지만 현재까지 흔적은 곳곳에 남아있다. 강증산은 막걸리도 곧잘 마시고, 신이 나면 얼씨구절씨구 어깨춤도 들썩이며 꽹과리나 장구는 물론 굿도 잘했고 평소 “나는 광대요 무당이며 천지농사꾼이다. 광대와 무당이 바로 가장 큰 후천개벽의 전위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오리알 터 주변엔 증산계열 종파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증산의 유일한 혈육인혈육이자 딸인 강순임 선사가 구암 김병철 정사와 공동창시하여 세운 증산법종교, 제자 안내성의 증산대도회(백운동 교인촌), 제자 이상호·이정립 형제의 증산교본부, 제자 김형렬의 미륵불교, 제자 서백일의 용화교본부, 증산 외손자가 세운 전각 청도대향원, 증산의 둘째 부인 고수부(태을교)를 모신 집 등이 자리잡고 있다. 이렇게 오늘날까지 증산계에서 태모라고 불리는 고수부가 이끌던 당시 증산교에는 [[일제시대]] 600만명이 신앙했던 [[보천교]]를 만든 월곡 차경석, 지금의 박한경이 만들었던 [[대순진리회]]의 전신인 무극대도교를 만든 정산 조철제, [[원불교]]를 만든 소태산 [[박중빈]]과 2대종법사 정산 송규, 동화교를 만들었던 이상호(본명 이동련), 이정립(본명 이성영) 형제들이 당대 고수부를 신앙으로 믿고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ref>{{뉴스 인용|url=http://news.donga.com/3/all/20100930/31515048/1|제목=김제 모악산 ‘미륵길’ 걷기―정여립 전봉준 강증산의 발자취 따라|성=|이름=김화성 전문기자|작성일자=2011-02-18|출판사=동아일보|확인일자=2013-07-12}}</ref>
 
당초 [[전라북도]] 고부 출신의 [[강일순]]으로부터 생겨난 증산교는 [[강일순]]은 특별히 종파를 만들지 않았고, 오로지 비겁에 빠진 인간과 신명을 널리 건져 지상선경(地上仙境)을 열기 위한다는 '천지공사'에만 매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09년]] 강일순의 사후, 그의 부인인 수부 고판례가 선도교를 만든 것이 증산교의 시초이다. 이후 증산 강일순의 제자이며 고부인측의 측근이었던 차경석이 고판례의 선도교로부터 분리되어서 보천교라는 증산교계열의 최대 종파를 만들었으며 신자간에 내부적 갈등을 겪으면서 여러 세부 종파로 갈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