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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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결과에 따름. 다만 금나라의 국서는 제왕운기와 고려사의 내용이 다른데 정사와 통설을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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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년]] [[2월 25일]] 어둠이 내릴 무렵 인종의 명을 받은 최탁과 오탁, 그리고 권수 등이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진입한다. [[지녹연]], [[상장군]] [[오탁]], 대장군 [[권수]], 장군 [[고석]] 등은 더불어 거사하여 대궐을 장악하여 척준경의 아우인 [[병부]]상서(兵部尙書) [[척준신]](拓俊臣)과 척준경의 아들인 내시(內侍) [[척순]](拓純)을 죽이고 시체를 궐 밖에 버렸다. 병부상서 척준신과 척준경의 아들 내시 척순, 지후 김정분, 녹사 전기상, 최영 등도 함께 제거하였다. 그러나 내직기두 학문이 성벽을 타고 넘어가 [[중랑장]] [[지호]]를 통하여 이자겸에게 이 사건을 보고하였다.<ref name="pare1996248">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48페이지</ref>
 
[[최탁]] 등의 공격 소식을 접한 이자겸은 [[척준경]]으로 하여금 자신의 아들 의장이 거느리고 온 현화사의 승려 3백여 명을 이끌고 궁성을 포위하도록 명하였다.<ref name="dangtack137"/> 이자겸과 [[척준경]], 이자겸의 아들 [[이지미]] 등은 사태를 접하고 처음엔 매우 당황해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급히 측근세력으로 구성된 조정 백관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해결책을 모의한 끝에 [[척준경]]의 말에 따라 반격을 가하기로 했다. [[척준경]]은 시랑 최식, [[지후]] [[이후진]], [[녹사]] [[윤한]] 등에게 수십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궁성문을 열라고 지시했다.<ref name="pare1996248"/> 이미 의장이 거느린 승려 3백명이 [[개경]]왕궁에 도착해 있었고 이들과 함께 궁궐을 공략한다.
 
척준경의 명령을 받은 소장들은 궁성에 도착하자 자물쇠를 부수고 성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고함을 지르며 반군들에게 항복을 종용했다.<ref name="pare1996248"/> 그러나 궁성병력은 그들의 숫자가 많은 줄 알고 문을 걸어잠그고 나오지 않았다.<ref name="pare1996248"/> [[2월 26일]] 아침 이자겸은 [[척준경]]을 직접 파견했다. 척준경은 비로소 자신의 동생 척준신과 아들 척순의 시체를 발견하고 복수를 다짐했다.<ref name="pare1996248"/> 그는 군졸을 불러모아 최탁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말하고 궁성을 포위할 것을 명령했다. 여기에 승려 의장이 이끄는 헌화사 승병 3백여 명도 가세했다.<ref name="pare1996248"/> 결국 척준경 군사는 왕궁을 장악했고 인종은 무장해제를 명했지만 병사들은 듣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