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 코크바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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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압 ===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브리타니아]]에 있는 [[섹스투스 율리우스 세베루스]]를 지휘관으로하여 다뉴브 근처의 군단을 돌려 진압군으로 파견하여 진압에 나섰다. 세베루스는 [[유다]]북부에서부터 차례차례로 공격에 성공하고 [[134년]] 대대적인 공세를 펴서 유대인들의 항쟁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하였다. 바르 코크바는 베르타에서 완강히 저항했으나 끝내 자결하고 [[136년]] 그 잔당은 전멸했다. 랍비 아키바 벤 요셉은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연구자들은연구자들{{출처}}은 하드리아누스가 [[원로원]]에 의례적인 승전보고만 하고, [[로마제국]]의 권위를 과시하는 개선식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3년에 걸친 전쟁으로 로마군의 손실도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 결과 및 영향 ==
=== 무자비한 보복 ===
기록에기록{{출처}}에 따르면 [[유대인]]의 거점 요새 50개가 함락되었고{{출처}} 985여개의 마을이 폐허가 되었으며{{출처}} 사망자는 약 58만 명이라고 한다.{{출처}} 또한 수많은 유대인이 [[노예]]로 팔리고{{출처}} 강제로 다른 이역으로 이주해야했다.
=== 추방 ===
이 전쟁의 결과로 [[유대]]의 이름은 시리아 팔레스타인으로 나중에 [[팔레스타인]]으로 바뀌게 되었다. 예루살렘은 다시한번 철저히 파괴 되었고 그 이름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완전히 바뀌어 철저하게 로마식으로 재건되었다. [[예루살렘]]이 항상 [[로마제국]]에 반대하는 항쟁의 진원지가 되기 때문에 하드리아누스는 모든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추방했고 다시는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