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717-718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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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Walls of Constantinople.JPG|thumb|right|250px|alt=|복원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삼중 성벽.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외곽을 구성하는 성벽 중 육로 쪽을 수비하고 있었다.]]
여름에 접어들자, 마슬라마는 함대로 하여금 자신의 부대에 합류할 것을 명했고, 그러는 동안 그의 군대는 [[헬레스폰트|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트라키아로 들어선다. 이 과정에서 아랍 군대는 진로 내에 있는 농촌 및 마을들을 군량 조달을 목적으로 철저히 약탈하고 파괴하였다. 7월, 혹은 8월 중순에 접어들자, 마침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한 아랍 군대가 육로 쪽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을 완전히 봉쇄하였고, 이들은 이중의 돌벽으로 된 포위망을 한 쪽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을 바라보도록, 그리고 다른 한 쪽은 반대편의 트라키아 농지들을 바라보도록 구축한다. 아랍 측의 사료에 따르면, 이 시점에 레오는 아랍 측에 도시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에 대한 몸값을 지불한다면 도시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하였으나, 마슬라마는 전투의 승패를 가리는 것 이외의 방법을 통한 평화는 없을 것이며, 따라서 자신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을 차지하게 되는 것은 이미 정해진 수순이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파일:Greekfire-madridskylitzes1.jpg|250px|thumb|left|[[마드리드 스킬리체스]]에 의해 묘사된, [[그리스의 불]]을 이용한 전투 모습.]]
 
한편 술레이만이 이끄는 아랍 함대는 9월 1일 도착하였으며, 우선 헵도몬 인근에 정박한 뒤, 2일 후 보스포러스로 진입하였고 이외에 여러 소규모 함대가 유럽과 아시아 지역의 여러 교외에 정박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 일부는 칼케돈의 남부에 있는 유트로피오스와 안테미오스의 항구로 이동해 보스포러스의 남쪽 진입로를 물색하였고, 나머지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흑해를 통한 타 지역과의 교섭을 차단하기 위해 해협 내로 이동, 콘스탄티노폴리스을 지나 갈라타와 클레이디온 부근의 해안에 상륙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랍 함대의 후위를 맡은 20척의 함선과 2,000명의 선원들이 도시를 지나치던 중, 남풍이 북풍으로 바뀌면서 그들을 성벽 쪽으로 몰아갔고, 비잔티움 함대는 즉각 이들을 [[그리스의 불]]로 공격하였다. 이 상황에 대해 테오파네스는 공격을 받은 함선의 일부는 완전히 격침되었고, 일부는 불길에 휩싸인 채 옥사이아와 플라타이아의 섬들 사이로 달아났다고 묘사했다. 이러한 결과는 비잔티움 측의 사기를 고무시키는 반면 당일 밤 이들을 통한 성벽 공략을 시도할 생각이었던 아랍 측의 사기는 꺾였고, 당일 밤 레오는 갈라타와 도시 사이에 쇠사슬을 설치하여 금각만으로 진입하는 해로를 차단한다. 이렇게 되자, 아랍 함대는 비잔티움 측과 교전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고, 북쪽의 소스테니온 해안의 안전한 항구로 물러났다.
 
[[파일:Greekfire-madridskylitzes1.jpg|250px|thumb|left|[[마드리드 스킬리체스]]에 의해 묘사된, [[그리스의 불]]을 이용한 전투 모습.]]
 
아랍 군대는 충분한 보급을 받고 있었고, 그 보급품은 그들의 진영에 쌓아놓은 상태였으며, 다음 해에 추수할 밀까지 준비해 놓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아랍 함대가 도시 봉쇄에 실패한 사실은, 비잔티움 측 역시 외부와의 교신을 통한 보급을 얼마든지 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아랍 군대는 이미 트라키아의 농지들을 모두 약탈한 상태였으며, 함대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교외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를 통한 보급도 제한되어 있었다. 겨울에 들어서자, 이들 간의 협상이 시도되었으나 이러한 사실은 오로지 아랍 측의 사료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 비잔티움의 사가들에게는 무시되고 있다. 따라서 아랍 측의 사료만을 참고해서 확인하자면, 레오는 아랍 측을 상대로 술수를 꾀했는데, 한 기록에 따르면 그는 마슬라마를 속여 그가 가진 대부분의 곡물을 비잔티움 측에 넘기도록 하였다고 하며, 다른 기록에서는 한 아랍의 지휘관이 '그렇게 하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민들이 아랍 측의 맹렬한 공격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성을 넘기려 할 것'이라는 말에 속아 이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일이 있었던 데다, 717년의 겨울은 매우 혹독하여, 3개월 내내 많은 눈이 땅을 뒤덮고 있었다. 결국 아랍 진영의 물자는 모두 바닥났고, 병사들은 군마와 낙타 및 다른 가축, 그리고 나무 껍질이나 낙엽, 나무 뿌리까지 먹어야 할 정도로 굶주리게 되었다. 그들은 새싹을 구하기 위해 눈을 파헤쳐야 했고, 심지어는 시체를 뜯어먹을 정도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전염병이 창궐하였는데, [[롬바르드]]의 역사가였던 바오로는 이로 인한 사망자 수가 30만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