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왕 (발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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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정왕|정왕]]이 병으로 죽자, 그 남동생인 대언의가 국무를 담당해, 당나라에 사자를 파견해 선왕의 죽음을 알렸다. 그 후 즉위 한 희왕은 연호를 주작으로 정하고, 다음 해 당나라의 내시인 이중민(李重旻)이 와서 그를 발해 국왕에 봉해주었다.
 
재위 동안, 당나라에 자주 사신을 보냈다. 또 이 시대의 교류의 특징으로서는 불교의 융성이 있다. [[813년]]에는 고예진(高礼進)등 37명을 당에 입조시켜, 발해의 금은의 불상 각 1체를 헌상 하였다. 이것은 왕실의 불교에의 귀의했다는 방증이며, 사실 발해의 유적에서는 대량의 동, 도제의 불상이 출토되었다.
 
또 일본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사신 파견을 실시해, 경제적인 면 이외에도이외에 문화 교류도 활발히 행해졌다. 발해사정사(渤海史正使)의 왕효렴(王孝廉)등의 한시 등은 「문화수려집(文華秀麗集)」에 수록되어 현재에 전해지고 있다.
 
== 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