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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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충'''(吳思忠, [[1327년]]~[[1406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문신이며, [[조선의 개국공신]]이다. 시호는 공희(恭僖)이다. 본관은 [[영원 오씨|영원녕원]](寧遠)이다. [[영원 오씨의오씨]]의 시조이다.
 
== 생애 ==
[[영일군|연일현]](延日縣)에 살았는데, 나중에 [[영녕군|영원진]](寧遠鎭)으로 이사했다. [[1355년]] 급제하여 [[사헌부]] 집의(執義), 좌사의(左司議) 대부 등을 지냈다. [[1392년]] [[음력 7월 17일|7월 17일]]에 조선 개국에 참여하여 3등공신에 녹훈되고 호조전서(戶曹典書)에 임명되었다. [[중추원]] 부사, [[강원도|강릉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조선왕조실록]]은 오사충을 법과 원칙을 엄격하게 지켰던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1404년]] 판사평부사(判司平府事)로 재직하다가 영성군(寧城君)에 봉군되었다. 1406년 죽었다. 아들은 [[서자]]인 오계종(吳繼宗) 하나가 있다.
[[영일군|연일현]](延日縣)에 살았는데, 나중에 [[영녕군|영원진]](寧遠鎭)으로 이사했다. [[1355년]](고려 [[공민왕]] 4) 문과에 급제하여 감찰규정·헌납(獻納)·집의(執義)를 역임하고, 창왕 때에는 좌사의대부로서 사전(私田)의 폐단을 상소하였다. 이해 공양왕이 즉위하자, 사인(舍人) 조박(趙璞) 등과 함께 상소하여 우왕과 창왕을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 것을 주장하고, [[이색]](李穡)·[[조민수]](曺敏修)·[[이인임]](李仁任)이 [[우왕]]·[[창왕]]을 옹립한 것을 탄핵하였다. 이와 같은 과격한 상소로 인하여 한때 관직을 삭탈당하였으나, 다시 복직되어 대사성을 거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다. 1392년(태조 1) [[정몽주]](鄭夢周)가 [[이성계]](李成桂) 일파를 몰아내려 할 때 그도 삭직되어 유배되었으나, 정몽주가 살해되자 풀려나와 좌상시(左常侍)가 되었다.
 
[[1392년]] [[음력 7월 17일|7월 17일]]에 이성계 추대에 참여하여 조선 개국공신 3등으로 [[호조]][[전서]]가 되고 영성군(寧城君)에 봉해졌다. 1394년 중추원부사에 오르고, 교주강릉도관찰사(交州江陵道觀察使)로 있으면서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과 가까운 수령·군인들이 직책을 소홀히 하거나 차례를 뛰어넘어 승진한 것 등을 엄하게 조사, 처리하였다. 1395년에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가 되고, 이듬해 정당문학(政堂文學)·경기좌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404년(태종 4) 판사평부사(判司平府事)로 재직하다가 영성군(寧城君)에 봉군되었다. 1406년 졸하였고 시호는 공희(恭僖)이다. 아들은 [[서자]]인 오계종(吳繼宗) 하나가 있다.
 
== 가족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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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고려의 문신]]
[[분류:조선의 문신]]
[[분류:고려의 정치인]]
[[분류:조선의 정치인]]
[[분류:조선의 개국공신]]
[[분류:영원 오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