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13번째 줄:
신학적으로는 성공회 사제인 웨슬리의 사상을 중심으로 성공회의 종교의 강령을 축약한 25개조와 웨슬리의 표준설교 그리고 신약성서주해와 <ref>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와 장정, [http://kmc.or.kr/combination-resources/law2012|제1편 제2장 제1절]</ref> 초기 그리스도교회 전통을 종합적으로 수용하고 있으며<ref>{{인용문|전통은 기독교 신앙공동체들의 모범적 유산이다. … 그러나 전통은 인간의 잘못으로 얼룩지게 되며, 이때 성경은 전통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따라서 전통의 비판적 수용은 기독교 신앙의 불변하는 진리와 그것의 사회적, 시대적 의미성 사이의 균형잡힌 이해를 추구하게 한다.|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와 장정}}</ref>, [[기독교대한감리회 신앙고백|감리회 신앙고백]]과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신경|사회신경]]을 두어 감리교회의 교리와 사회적 책임에 대해 명확하게 선언하고 있다.
 
==민족의 고난을 함께 한 감리교회==
{{문단 정리 필요}}
감리교회는 일찍이 전래 당시 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교단이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하여 독립협회 창설에 도움을 주었으며, 배재학당 출신 이승만을 옥중지원했으며, 3.1독립 선언을 한 33인중 감리교인은이필주, 장로교인과신석구 함께 16인,감리교인 9명은 장로교인 7명 함께 개신교 대표로 참여했다. 이후 일제 탄압을 받았고, 독립운동에도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였고, [[유관순]] 열사는 감리교인이었다. 특히 스크랜턴 선교사는 전덕기를 전도하여 서울 숭례문(남대문)에 있던 상동감리교회에서 감리교청년 연합회를연합회인 구성해엡웟회와 [[상동청년학원]]을 민족의식을 가진 청년들이 모여 을사조약 반대운동을 하였고, 독립 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한 "신민회"는 감리교회의 지원으로 탄생하였다. 특히 신민회가 조직된 상동감리교회는 [[이준 (외교관)|이준]]의 [[헤이그 특사]] 파견을 협의하고 실행한 곳으로 유명하다. 또한 사민필지의 저자인 헐버트 선교사는 동대문교회의 담임자로서 수많은 애국자들을 키워냈다키워냈으며, 고종의 밀사로서 활약했다. 김상옥 의사는 동대문교회 출신이다.
감리교회는 에큐메니칼 운동과 토착화 신학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적인 상황에서 신학적 토착화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한국 개신교회 활동의 기초를 닦는 역할을 했다. 서울YMCA를 통한 하나님 나라 건설과 지덕체를 건강하게 키워내는 다양한 체육 여가활동을 연합사업으로 성장시켰고, 현재 한국 개신교회 전체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감리교와 장로교 연합공회의(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1921년 11월 둘째 주일 지난 수요일로 정하면서 한국 개신교의 기준이 되었고 부활절 연합예배 및 군선교 등에서 연합활동에 힘썼다.
70년대에는 민주화투쟁 및 노동자 운동(예 전태일 열사), 도시산업활동을 통해 노동자의 인권과 시민의 권리확보를 위해 노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