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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곤양 군수를 거쳐 풍기 군수로 있을 때, 여러가지의 일화들을 남겼다.
풍기
[[1542년]](중종 37) 백운동에 [[고려]] 말의 학자 [[안향]]의 사당을 세웠다. 이듬해 [[백운동 서원]](소수 서원)을 창설하였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서원이다. 1541년 5월 22일의 실록에서는 '사당의 좌우에 학교를 세워 유생이 거처하는 곳으로 하고, 약간의 곡식을 저축하고, 이자를 받아서, 고을 안의 모든 백성 가운데에서 준수한 자가 모여 먹고 배우게 하였다. 당초 터를 닦을 때에 땅을 파다가 구리 그릇 3백여 근을 얻어 중국에서 책을 사왔는데, 경서(經書)뿐만 아니라 무릇 정·주(程朱)의 서적도 없는 것이 없었으며, 권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이항의 분경과 관련한 문제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다른 유학자들과는 달리 타 학문에 대한 유연한 사고방식과 백성을 위한 마음가짐의 선비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기록했다. 흉년이 들었을 때, 자신의 재산을 털어가면서 백성들을 구황하였는데, 그의 구황실적은 도내 제일이었다. 풍기 군수에 제수된지 1년 뒤 조정에서는 이와 관련한
저서에 《무릉잡고(武陵雜稿)》, 편서로는 《죽계지(竹溪誌)》·《동국명신언행록(東國名臣言行錄)》·《심도이훈(心圖彛訓)》 등이 있으며,〈도동곡(道東曲)〉·〈육현가(六賢歌)〉·〈엄연곡(儼然曲)〉·〈태평곡(太平曲)〉 등 장가(長歌)와 〈군자가(君子歌)〉 등의 단가 8수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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