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창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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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황해도]] [[장연군]] 후남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면서 반신불수인 홀어머니가 가계를 혼자 가계를 꾸려나가느라 생활이 어려웠다. 조창손은 어릴 때 친척 집으로 보내져 과수원 일을 도와주면서도와주며 자랐다. 정식 학교는 다닐 수 없었고 야학을 이용해통해 중학교 과정까지 마쳤다.
 
[[몽금포]]에서 친척의 어업을 도와주던 중 이 지역에 [[소군정]]이 실시되면서 [[사회주의|사회주의사상]] 눈뜨게사상을 알게 되었고 [[김일성]]이 청년 조직으로 결성한 [[북조선민주청년동맹]] 조직에 [[1947년]]에 가입하여 조직 생활을 시작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발발하자 그해 8월 [[조선인민군]]에 입대하여 참전했다입대했다.
 
[[1956년]] 군에서제대한 제대하고 나서 [[부포]] 수산사업소에서 [[황해]]의 어선을 지키는 보위성원으로 근무하던 중 기관 기술을 배워 선박 기관장으로 전업했다. [[1959년]] [[조선로동당]]의 소환으로 [[강원도 (북)|강원도]] [[고성군 (북)|고성군]]에서 남파 공작원 수송을 담당하게 되었다. [[1962년]] [[울진군]]에서 공작원과 접선을 시도하던 중 발각되어 산으로 도망쳤다가 체포되었다.
 
[[1963년]]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서선고 옥살이가 계속되었다받았다. [[1970년대]]에는 사람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끔찍한 고문을 동반한 전향 강요가 있었으나 절대로 전향하지 않았다. [[1991년]] 집행 집행정지로정지로 풀려날 때까지 29년 8개월 동안 수감 생활을 했다. 출소 직후에는 대한민국에 연고가 없는 [[김석형 (1914년)|김석형]]과 함께 요양소에 있다가, 주차장 안내, 건물 경비 등으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소일했다.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에 의거해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되었다.
 
또다른 비전향 장기수 [[장병락]]은 조창손이 탄 배의 기관장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붙잡혔다가 장기간 수감 생활을 하였으며, 송환 대상에도 함께 포함되었다.
 
== 예술작품예술 작품 ==
비전향 장기수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송환 (영화)|송환]]》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다. 이 영화를영화의 감독한감독 [[김동원 (1955년)|김동원]]은 조창손과 김석형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송환》을 찍게 되었다. 영화 속의 조창손은 눈물이 많고 정도 많은 성품이다. 김동원은 촬영 중 조창손의 인간미로 말미암아인해 영화의 초점이 차츰 조창손 쪽으로 이동되었다고 밝혔다.<ref>{{뉴스 인용
|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81441
|제목=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생각한다 - 영화 <송환>의 김동원 감독과 행복한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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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창손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소설장편 소설 《꺼지지 않는 불》이 창작되었다.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