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도비쿠스 3세 카에쿠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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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신성 로마 제국 황제]]<br />[[프로방스]]의 왕<br />[[부르군트]]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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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3세'''(Ludwig Ⅲ) 또는 '''루티비히 맹인왕'''(Ludwig the Blind, [[880년]]경 – [[928년]] [[6월 28일]])은 [[프로방스]]의 왕 (887년부터887년 11월부터), [[이탈리아의 군주|이탈리아 왕]] ([[900년]] [[10월]] 또는 [[12월]]부터), [[901년]]부터 [[905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다. [[신성로마제국의 루트비히 2세]]의 딸 이밍가르트의 와 [[프로방스의 보소]]의 아들이다. 또한 그의 고모 리첼다는 [[대머리왕 카를 2세]]의 후처였다.
 
7세에 아버지 보소가 사망하자, [[카를 3세]]의 보호를 받았고, 뒤에는 [[아르눌프 폰 케른텐|아르눌프]]의 봉신이 되는 조건으로 그의 보호를 받았다. [[890년]]에 프로방스 왕이 되고, [[900년]] [[프리울리]] 출신 [[롬바르디아]]의 왕 [[베렌가리오 1세]]에 반대하는 롬바르디아 귀족들의 추대로 10월 파비아에서 롬바르디아의 왕으로 선출되고 [[901년]] [[2월]] [[로마]]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4세]]의 축성을 받고 신성 로마 황제관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베렌가리오 1세와의 오랜 전쟁 끝에 [[905년]] [[7월]]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베렝가리오에게 포로로 잡혀 그에게 두 눈을 뽑히고 프로방스로 추방되었다. 그의 별명 맹인왕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 생애 ==
[[루트비히 2세 (이탈리아)|이탈리아인 루트비히 2세]]의 딸 이밍가르트와 [[프로방스]]와 [[부르군트]]의 제후로 [[서프랑크 왕국]]의 혼란기에 자립했던 [[프로방스의 보소|보소]]의 아들이다. 왕비는 [[비잔틴 제국]] 황제인 [[레오 6세]]와 프랑크족 출신 아델라이드의 딸인 [[비잔틴의 안나]]이다. 또다른 아내 아델라이드는 북부 부르고뉴의 제후 [[콘라트 1세 (부르고뉴)|콘라트 1세]]의 딸이다. 보소가 사망할 당시 그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벨프 왕가]] 출신 [[부르고뉴]]의 제후 [[콘라트 1세 (부르고뉴)|콘라트 1세]]는 재빨리 부르고뉴의 북부 지역을 점령하고 스스로 왕을 자처하였다. 후에 루트비히는 [[콘라트 1세 (부르고뉴)|콘라트 1세]]의 딸 아델라이드와 결혼하게 된다. 또한 [[콘라트 1세 (부르고뉴)|콘라트 1세]]의 여동생 아델라이드는 다시 루트비히의 삼촌인 [[부르고뉴]] [[공작]] [[정의공 리샤르 오툉]]과 결혼하였다.
 
[[887년]] 아버지 보소가 죽자 그는 프로방스의 왕이 되었는데 나이가 어려 권력이 불안하였다. 섭정으로는 어머니 이르밍가르트와 삼촌 [[정의공 리샤르 오툉]]이 그를 대신하여 왕국을 다스렸다. 어머니 이밍가르트는이르밍가르트는 아들과 함께 황제 뚱보왕 [[카를 3세]]에게 의탁하여 도움을 요청하였고, 어머니 이밍가르트의이르밍가르트의 사촌이었던 [[카를 3세]]는 그를 양자로 삼고 왕으로 인정, 보호해 주었다. 또한 그에게 [[비엔나]] 백작의 작위도 내려주었다. 그러나 [[887년]] [[11월]] 카를이 조카 [[아르눌프 폰 케른텐|아르눌프]]의 쿠데타로 실각하고, [[888년]] [[1월]] 카를이 죽자, 다시 카를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케른텐의 아르눌프]]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아르눌프는 그가 아르눌프의 종주권을 인정하자 [[890년]] 루트비히를 [[아를]], [[프로방스]] 그리고 [[부르고뉴]]의 왕으로 인정해고 보호해 주었고, [[Visio Karoli Grossi]]를 작성하여 그를 [[카롤링거 왕가]]의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인정해주었다. 그러나 랭스의 대주교 풀크에 의하면 901년 그가 황제로 즉위한 뒤에,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작성했다고도 한다. [[894년]] 루트비히는 아르눌프의 봉신이 되었다.
 
루트비히는 치세 동안 내내 사라센의 침입에 맞서 싸워야 했다. [[900년]] 그는 [[롬바르디아]] 왕 [[베렌가리오 1세]]가 [[이탈리아]]로 쳐들어 온 [[마자르 족]]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자, 루트비히는 [[베렌가리오 1세]]의 반대파 [[이탈리아]]의 제후들의 요청으로, 황제 루트비히 2세의 손자의 자격으로 이탈리아로 가게 되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헝가리인|마자르족]]의 침입으로 무능한 [[베렝가리오 1세]]의 통치 아래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루트비히는 [[900년]] [[10월]] 파비아에서 열린 이탈리아 귀족회의에서 귀족들에 의해 [[롬바르디아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바로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베렝가리오의 군대를 무찌르고 [[900년]] [[롬바르드족]]의 옛 수도인 [[파비아]]에서 [[10월 12일]] [[이탈리아의 군주|이탈리아 왕]]에 올랐다. 그는 계속하여 로마로 진군하여 [[교황 베네딕토 4세]]에 의해 이듬해 2월에는 축성받고 [[신성로마제국황제]]의 대관식도 치렀다. 그러나 [[902년]] 그는 베렝가리오에게 패하여 영원히 이탈리아를 떠나는 서약을 하고 프로방스로 물러났다.